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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특별기고

동학농민혁명,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으로 놔줘야

l특집 기획l 동학농민혁명 전국화재조명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으로 놔줘야

 

박대길(문학박사)

 


동학농민혁명하면 떠오르는 전라북도


대한민국 국민에게 동학농민혁명하면 떠오르는 지역이 어디냐?”고 물으면, 다수는 전라북도를 이야기한다. 그만큼 동학농민혁명과 전라북도는 불가분의 관계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사실 사발통문과 전봉준으로 상징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유적지가 전라북도에 집중되어 있고, 전봉준과 조병갑 그리고 사발통문봉기계획과 고부봉기, 이와 함께 무장기포백산대회황토현전승일전주성 점령일집강소 실시남원대회삼례기포구미란전투태인전투대둔산 최후 항쟁이 집중된 전라북도를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로 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反封建) 민주화운동과 반외세(反外勢) 민족자주화운동이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 범위는 전라북도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된다.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평등은 물론 생명존중사상을 근간으로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주의에 맞선 혁명이자 전쟁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세계사적인 혁명 또는 반침략 평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으며, 그 중심이 바로 전라북도라는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좌절과 실패로 인해 역적과 반란의 굴레에 갇혀 있을 때, 가장 먼저 혁명의 상징적 조형물을 설치한 곳 역시 전라북도이다.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그 당시 국문학계의 원로였던 가람 이병기 선생이 추진위원장을 맡았고, 역사학계의 원로인 김상기 박사가 비문(碑文)을 지었다. 그리고 기념탑에 새겨진 제목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은 강암 송성용 선생이 썼다고 한다. 기념탑 건립이 추진되던 중에 그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자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의 후원과 참석으로 이러 저런 말들이 있지만, 국가의 최고 실세가 참석하여 격려하며 혁명이라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인식이 달라지고, 후손들이 전과 다르게 당당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곳도 바로 정읍, 전라북도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최고 실권자가 된 박정희는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동학농민혁명과 자신의 쿠데타가 동일한 목적을 가진 혁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것은 공주 우금치에 세워진 기념탑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남북대치 상황과 경제개발을 내세워 3선 개헌과 유신헌법으로 1인 장기독재정권을 노골화하며 국민의 민주화의지를 총칼로 짓밟으며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이것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때 형성된 민주화운동의 뿌리는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고, 정읍 황토현전적지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 답사 일번지가 되었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세력의 정신적 뿌리가 동학농민혁명이었던 것이다.

 

지자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 계획



1998DJ정부 출범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전라북도는 1999년에 전국 최초로 동학농민혁명정신 선양사업기본계획수립을 위한 연구용역을 사단법인 (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맡겼고, A4용지로 427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보고서에는 지역문화와 역사에 대한 전라북도 주민의식조사가 포함되었다. 주목되는 내용 중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의 저항정신이 전북을 대표하는 정신이다.”라는 설문조사에 대해서, 응답자 중 전적으로 동의한다(34.1%)와 약간 동의한다(49.4%)라는 답이 83.5%를 차지하였다. 간결하게 동학농민혁명정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인데 굳이 저항정신을 강조하고 있지만, 응답자 절대 다수가 전북을 대표하는 정신문화로 동학농민혁명정신을 선택하였다. 상대적으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13.7%)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2.8%)16.5%였다.


그 당시 전라북도는 전북의 정체성을 동학농민혁명에 두었고, DJ의 전북 방문 때에는 동학농민혁명(교육)기념관 건립을 건의하여 성사시킴으로써 2004년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정신문화가 동학농민혁명정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를 범도민 차원에서 개최해야 하느냐 또는 개별 사건이 벌어진 지역에서 개최해야 하느냐는 설문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여 범도민적인 지역축제를 개최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이었다. 그 결과, 반드시 필요하다(43.1%), 약간 필요하다(47.1%), 별로 필요하지 않다(8.7%), 전혀 필요하지 않다(1.2%)로 답변함으로써 압도적으로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방법론에 대해서는 각 지역의 자율적 개최를 원칙으로 하되, 지역간(사업회간) 협의회를 통해서 최소한의 조정과 협조체계를 갖추자.”는 것으로, 향후 해당 지역 간 협의를 통해 전라북도 차원의 통합적인 기념행사 개최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전라북도 내 각 시군은 독자적인 기념사업과 행사를 갖을 뿐 지역 간 연대나 협의는 아예 시도조차 없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추진하면서 지역 간 갈등을 양산하고, 첨예하게 대립함으로써 아예 기념일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더욱이 2개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던 양상이 이제는 3개 지역 또는 4개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그 갈등의 골이 확산되어 더욱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북도 차원의 적극적인 역할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동학농민혁명 관계자(전문연구자 포함) 18명을 대상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한다면이라는 설문조사를 하였다. 이들 중 6명이 지방 권력을 장악했다.”는 명분을 들어 전주입성일을 선택, 33%를 점하였다. 그 다음으로 무장기포일(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날)3명으로 16%, 백산대회일(혁명의 조직과 이념이 표방된 날)2명으로 11%, 황토현전승일(농민군이 거둔 최대 최초의 승리)2, 삼례기포일 1, 우금치전투일 1, 고부봉기일 1, 굳이 정할 필요 없다 2명이었다.


기념일로 적합한 날에 대한 기준과 원칙조차 제시되지 않았고, 전적으로 응답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설문조사였다는 점은 훗날 기념일 제정의 난항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즉 주관적 판단으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날을 추천한 응답자들이 훗날에는 입장을 바꿈으로써 전주입성일은 유력한 날에서 아예 제외되어 버렸고, 이후 기념일 제정 추진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역사적 사실 검증은 물론 기준과 원칙마저 제시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기념일 제정을 추진하는 주체들이 누구냐에 따라 기념일로 적합한 날이 바뀐다는 지적을 받게 했고, 현재도 그러한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2015년 전주시가 기억하는 동학농민혁명


2015년 말, 전주시는 전주동학농민혁명 역사문화벨트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보고서 내용 중 전주시민(완산구 277, 덕진구 215)과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508)을 대상을 한 설문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전주에서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역사적 사실(전주성 진입 과정, 전주성 점령, 완산전투, 전주화약, 집강소 설치와 전주대도소 설치, 삼례기포, 김개남 등 농민군 순교)에 대해서 61.7%가 전혀 모른다고 답한 것이다. 이를 구분하면 전주시민 492명 중 46%228명이 전혀 모른다고 답하였고,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은 76.6%가 아는 것이 없음으로 답하였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기념행사가 개최되었으며,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이 한껏 고조되었다. 그런데 2004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이 추진되면서 오히려 전주시를 포함한 전라북도 전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즉 정읍과 고창의 동학농민혁명으로 전락한 것이다.

 

일상화된 동학농민혁명 행사와 기념일 제정


동학농민혁명 124주년을 맞이하여 관련 행사가 전국에서 연례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도내에 국한하더라도 전봉준 장군 탄신제를 시작으로 고부봉기재현행사’, ‘전봉준 장군 순국 추모제’, ‘동학농민군 무장읍성 무혈입성 재현행사’, ‘동학농민혁명백산봉기기념제’,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등이 개최되었다. 5월 말에는 동학농민혁명 전주성 점령 및 전주화약 기념주간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등 1년 중 전반기에만 동일한 성격의 행사가 정읍, 김제, 부안, 고창, 전주 등지에서 개최된다. 매월 1번 이상의 행사가 개최되는, 가히 동학농민혁명 시즌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제정 역시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반복되고 있다. 지난 해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상대로 특정지역을 거론하며,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특정 지역과 관계되는 날 중, 어느 날이 선택되어도 문제를 삼지 않겠다고 공개석상에서 발언하였다. 마치 특정지역만이 기념일로 적합하다는 것인데, 이를 받은 문체부가 정중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 문화체육관광부는 독자적으로 기념일 제정을 추진할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대신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의 자문을 받아 움직일 것이 자명하다. 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과 관련된 국가의 사무를 위임받아 전담하는 특수법인이다. 지난 해, 필자가 기념재단의 책임자들에게서 기념일 제정과 관련하여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기념일 제정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할 일은 없고, 문체부가 알아서 할 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을 전담하는, 전액 국비를 지원받아 운영되는 기념재단의 책임자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문체부가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2016년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주관했던 기념일 제정 추진과 상당부분 겹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그러기에 아예 기념일 제정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각과 지적이 있다. 처음부터 공론화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비공개로 특정일을 선택한 후 공론화 과정을 거치겠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 지금껏 기념일이 제정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기준과 원칙마저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일을 기념일로 만들기 위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1894년에 있었던 개별 사건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 검증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념일 제정이 추진되었다. 2015년에 기념일로 확정된 것처럼 보도된 전주화약일, 역사적 사실 검증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한편, 국민 다수가 시작일로 알고 있는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과 성격이 다른 민란이나 봉기로 단절되어 있으며, 공공연하게 사발통문의 내용을 부정하는 연구자들이 특정일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일로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개별 사건에 대한 검증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념일을 제정하겠다고 하니, 여러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라북도 것이 아닌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를 기대하며



동학농민혁명은 한 마디로 하느님이 존귀한 분이듯이 모든 인간도 존귀하다(人乃天)는 동학사상과 그 당시 백성의 다수를 점하면서도 핍박과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이 결합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만들고자 했던 혁명이었다. 조선왕조의 신분제 사회에 맞서 인간평등과 자유를 근거로 민주사회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외세의 침탈에 맞서 민족자주와 평화를 추구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분명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혁명이라 자부한다.


특히 전라북도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 그리고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사회개혁으로 승화시킨 혁명의 진원지이자 중심지이며, 더불어 반침략 민족자주화운동의 시발지이다. 그러기에 국민 다수가 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라북도를 떠올린다. 한 때 전라북도의 정체성과 정신을 동학농민혁명과 동학농민혁명정신에 두었던 것도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난 해 부터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정신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도내에서 강하게 대두되었고, 최근에도 반드시 포함시키겠다는 우리 지역 국회의원의 인터뷰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처럼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전북에서만 동학농민혁명이 강조되는 것은 그만큼 전북의 정신으로, 전북의 정체성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제격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지금은 자동 폐기되었지만, 대통령이 국회에 보낸 헌법 개정안에는 31만세운동과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이 포함되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학농민혁명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현 정권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지 못한 이유와 원인을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필자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이 정읍과 고창을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경상도에서 탄생한 동학이 전라도에서 혁명의 불꽃을 피우고 나아가 반침략 평화운동의 출발지가 되었으나 충청도에서 안타깝게 좌절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전국화를 모색하지 못하고, 특정지역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매몰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우선적으로 경상권과 전라권 그리고 충청권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문화권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화로 나아간다면, 동학농민혁명은 남과 북의 동질감 회복과 민족통일의 교두보가 될 뿐 아니라 통일 이후 정신적 통합에 유용한 자원이 되리라 본다.  

                                   / <사람과 언론> 창간호(2018년 여름)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