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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특별기고

변호사의 체험을 통해 본 한국의 민주화

특별 기고-한승헌(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시국사건과 나의 행보

 

독재국가, 장기 집권, 군사쿠데타, 헌정파괴, 탄압, 고문, 정치범....., 한국을 연상케 하는 불행한 언어들. 그러나 국민의 힘으로 그 온갖 억압구조를 물리치고 민주정치를 바로 세운 희귀한 나라. 대통령이 사형수가 되고, 또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 나라의 중책에 전과자들이 우글거리는 나라 - 한국. 이런 나라에선 변호사의 소임이 그리 단순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행보는 순탄치가 못했다. 한국의 상황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5년간 검사로 근무하고, 1965년 가을 변호사로 전신했다. 그리고 내가 예상치 않았던 정치적 사건 또는 시국사건의 단골 변호인이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역대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엄청난 정치범 내지 시국사범이 양산되었고, 나는 그 수난자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또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매우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중에, 1975년 3월, 시인 김지하의 변호인을 사퇴하라는 KCIA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계엄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8년 만에 복권되었다.

 

1998년 봄,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 퇴임한 뒤 다시 재야 법조계로 북귀하였고, 2005년에는 국무총리와 함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일한 바도 있다.

 

정치적 사건의 성격

 

한국은 비단 정치뿐 아니라 문화, 제도의 여러 면에서 분단과 독재라는 두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정치범의 양산도 궁극적으로는 분단과 독재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의 변칙화도 거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8.15해방 후의 정치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 점이 극명해진다.

 

이승만의 반공노선과 사법권 경시

 

해방 후 한국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워 친일세력을 정부와 경찰의 요직에 중용하고, 반민족행위자(친일부역자)를 처벌하는 위원회를 강제해산시키는 등 반역사적 횡포를 자행하였다. 사법부를 경시하고 매도하는가 하면, 1인 장기 집권을 위해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국가보안법 등을 악용하였다.

 

박정희의 쿠데타와 헌법 파괴 그리고 사법권 침해

 

4.19 후의 합헌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무너트리고 권좌에 오른 박정희는 재임 17년 동안 무단정치로 일관했다. 그의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 종교인, 야당 재야인사 등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3선 개헌, 유신통치, 비상계엄, 용공조작, 대통령 긴급조치, 사법살인 등 법치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는 지배가 계속되었다. 수 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희생자가 되었고, 사법부와 검찰은 집권자의 시녀노릇을 거부하지 못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에는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조작, 광주 학살 등 만행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정권을 승계한 노태우의 집권 시기까지, 군복만 바꿔 입은 대통령의 압제정치가 계속되었다. 사법의 위상과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두 정권의 막간에 1987년의 ‘6월민주항쟁’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기는 하였으나, 야당의 분열로 민주정부 수립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독재시대의 사법부

 

이승만시대에는 김병노 초대 대법원장 같은 인물이 재판에 대한 간섭을 질타하면서 사법권의 독립을 유지해왔으나. 박정희 이후의 군사정권 하에서는 사법부가 그 소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했다. 역대 대법원장의 입을 통하여 영합적이거나 치욕적인 실상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어떤 분은 “유신은 인권보장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했고, 또 다른 분은 “국가 안보와 사회방위에 역점을 두는 법원이 기능”을 강조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대법원장 재임시절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시대’였으며, 정권측으로부터 여러 가지 ‘주문’을 받은 일도 있다고 고백했다.

 

대체로, 재판에 대한 국민의 의혹, 불신이 분노와 저주로 변하여, 성명과 시위가 잇달았으며.재판 거부, 법정 소란이 빈발했다. ‘유신판사’니, ‘판사의 검사화’니 하는 악평이 나왔는가 하면, 법관의 권력 추종적 행태에 국민의 비판이 모아졌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 인사상의 불이익을 입거나 재임명에서 탈락되는 법관도 있었다.

 

사법부의 명맥을 지킨 법관들

사법부가 무력과 순응으로 길들여진 가운데서도, 사법의 독립을 지키고자 양심과 소신을 굽히지 않은 법관들도 있었다. 중요한 사례를 열거해본다.

 

-진보당 사건 재판(1심)에서 조봉암(曺奉岩)의 간첩 혐의를 부정한 유병진(柳秉 震) 부장판사

-무장군인의 난입 협박에도 굽히지 않고 시위학생의 구속을 거부한 양헌(梁憲) 부장판사

-월간 <다리>지 필화사건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고, 법원을 떠난 목요상(睦堯 相) 판사

-동백림사건 상고심에서 간첩죄에 무죄를 선고하고, 빨갱이 법관으로 몰린 대법 관들

-박정희 암살범 김재규의 상고심에서 내란목적살인을 부정하는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들

-박정희의 장기집권 비난으로 기소된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사임한 이영구 판사

법관들에 의한 집단적 항의와 다짐 - 사법파동

 

행정부의 사법권 침해에 항의하고 사법의 독립 수호를 다짐하는 법관들의 집단적 의지 표명은 세 번에 걸친 사법파동으로 나타났다. 1971년의 제1차 사법파동, 1988년의 제2차 사법파동 등은 각기 그 발단의 계기나 전개 양상은 달랐으나, 사법권 침해에 대한 법관들의 집단적 저항과 자체 반성 및 개혁의 촉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 파동이 일과성에 그쳤다던가, 개혁의 웨침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구태가 재연된 아쉬움이 있으나, 현직 법관의 신분으로 그만큼의 의지 결집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내가 변호한 문제의 사건들

 

조국의 분단과 이를 빌미삼은 독재정권의 탄압은 많은 시국사건을 양산했다.

 

1) 필화사건; ‘분지’사건 / ‘오적‘사건 / ’어떤 조사(弔辭) 사건 / ‘민중교육’지 사 건 / ‘진달래 그림’ 사건 / ‘노동과 노래’ 책 사건 / ‘기독교와 민족통일’ 강연사건

2) 북한측 접촉 혐의; 동백림 사건 / 통일혁명당 사건 / 서 승 형제 사건 / 한양지 사건 / 울릉도 사건

3) 통일운동; 남북한 유엔동시가입론사건 / 남북작가회담 추진사건 / 문익환목사 방북사건 / 전대협 임수경 양 방북사건 / 작가 황석영 씨 방북사건 / 김일성 주석 조문기도사건 / 한겨레신문 방북 취재 기획사건

4) 저항세력 탄압사건; 반유신 야당의원 구속사건 / 남산부활절예배사건 / 대통령 긴급조치사건 / 야당대통령후보 선거법위반사건 /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구 속사건 / 보도지침 폭로사건 / 목요기도회 설교사건 / 대우조선 노동자 장식 방해사건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 부천서 성고문사건

5) 북한 출판물 관련; ‘해방조선’ 출판사건 / ‘조선전사’ 출판사건 / ‘한국근현대민 족운동사’ 출판 사건

6) 변호권 침해; 민청학련 군법회의 변론사건 / 김지하 변호인 사퇴 요구 거부사 건

탄압에 악용된 죄명이나 법조(法條)는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국가보안법 / 반공법 / 내란예비음모 / 대통령긴급조치 /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선거법 / 집회시위에관한법률 / 뇌물죄 / 간통죄 / 범인은닉죄 / 저작권법 / 장식 방해죄 / 주거침입죄 / 업무방해죄 등

 

감방에 들어간 변호사들

 

변호사들은 변호인석 아닌 피고인석에도 서야 했고, 법정 아닌 감방에도 드나들어야 했다. 때론 거리에도 나와야 했다. 수난의 변호사 몇 분만을 소개한다.

 

1) 이병린 李丙璘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으로서, 박정희정권의 비상계엄 무효선언 후 구속 /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사임 요구 거부 후 구속

2) 태륜기 太倫基 변호사; 재일동포사건의 형사기록 일부를 피고인 가족에게 넘겨주었다는 이유로 징계처분을 받음.

3) 강신옥 姜信玉 변호사; 민청학련사건 변론 중, 정권 비판 및 학생 비호 발언으로 구속

4) 한승헌 韓勝憲 변호사; 김지하 시인의 변호인 사퇴 요구 거절 후 반공법으로 구속 / 박정희 암살 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복역

5) 이태영 李兌榮 변호사; 한국 여성 법조인 제1호.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기소, 유죄판결로 변호사자격 박탈

6) 이돈명 李敦明 변호사;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재야 운동가 은닉을 허위로 시인, 구속

7) 노무현 盧武鉉 변호사, 이상수 李相洙 변호사;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노동자의 장지(葬地)문제를 조언했다고 형법상 ‘장식방해(葬式妨害)죄로 구속

 

변호인의 역할과 투쟁

 

정치적 사건에서 변호인의 입장이나 역할은 좀 특이할 수밖에 없다. 우선, 자원봉사적인 면이 강하고, 수임에 따르는 불이익(방해, 사퇴 요구, 감시, 협박, 회유 등)을 극복해야 한다.

 

위법한 접견 금지, 변론 제한, 자의적 증거 결정, 피고인의 발언 제한 등 부당한 소송지휘 에 대하여 불복 항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피신청, 퇴장, 변론 거부 등 극한적인 대응도 불사(不辭)한다. 편향적이거나 부정확한 언론 보도에 대한 대책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막강한 권력의 독기(毒氣) 앞에 맨몸으로 맞서는 피고인을 위해 방어와 반격의 우군(友軍)이 되고, 동지가 되어야 한다. 체념이나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 관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가족, 친지, 지원단체, 인권단체, 언론매체 등에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바른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오도(誤導)된 세론을 바로잡는 노력도 중요하다. 수사기관에서의 고문, 가혹행위를 밝혀내고 검찰의 반칙적 공격을 제지시킨다. 피고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고난과 싸움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유의하도록 힘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활동의 외연(外延) 확대

 

변호사는 개별사건의 변호와 해결을 위한 일반적 활동 외에도, 민주화와 인권보장을 구현할 정의사회 실현을 위하여 거시적 관점을 갖추고 행동영역을 넓혀 나가야 했다. 나의 경험은 대체로 이러했다.

 

1) 민주화운동 참여;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실행위원, 민주헌법재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등 단체에 참여

2) 변호사단체 구성원으로서의 활동; 대한변호사협회, 서울지방변호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인권운동, 대외협력, 출판 홍보, 연대운동 등에 동참

3) 시민운동;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4) 언론, 저술활동; 신문 잡지 기고, 저서 출판, 방송 출연, 강연 등

5) 피고인으로서; 법정 진술(서), 증거신청, 변호인단 구성, 감옥 안팎의 언동

6) 범국민연대운동에 집단으로 참여; 6월민주항쟁에 변호사들의 집단 참여

 

‘민주화’의 성취 전후

법정에 선 정치적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존경받는 피고인’ 들이 많았다. 그들은 판결문 상으로는 ‘죄인’이었으나, 역사의 눈으로 보면 의인이었다. 애국적이고 양심적인 지도자,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구속, 기소, 재판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변호인들은 목격자, 응원자, 기록자, 증언자, 평가자, 수호자로서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변호사들은 박해의 덫에서 수난자들을 구해내는 단계에서뿐 아니라 그들이 정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활동하는데, 믿음직한 지원자, 조언자가 되었다. 정계나 공직에 참여하여 전문성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1987년의 6월민주항쟁을 고비로 (비록 노태우 정권 5년이 끼어들기는 하였으나) 범국민적 재야세력은 민주화의 전환점을 확보하였다. 소위 ‘6. 29선언’에 뒤이은 대통령직선제와 기본권 보장 등을 포함하는 개헌은 오랜 반독재 투쟁의 성과물이었다.

 

1993년의 김영삼정부를 거쳐, 1998년의 김대중정부, 그리고2002년의 노무현정부를 거치는 동안, 사법부에 대한 집권자 측의 간섭은 거의 사라졌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있게 된 것부터가 민주사회의 구현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에는 정치적 사건의 피고인들과 그들을 지원했던 변호인들의 역할이 큰 몫을 하였다고 본다.

 

과거의 사법적 오류에 대한 법적 처방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는 대통령과 정관계 요직에 과거의 ‘정치적 전과자’들이 많이 포진하였다. 그만큼 반민주시대의 ‘악의 유산’ 청산도 도마에 올라, 지난날 독재정권시대에 범한 사법적 오류를 바로잡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즉, 이미 확정판결이 난 과거 사건에 대한 재조사활동, 재심 무죄의 판결이 연달아 나왔다. 그 대상은 주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대통령긴급조치를 적용했던 시국사건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반국가단체론, 국가기밀의 범위,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 고무 동조 회합 등의 해석에 논리적 현실적 모순 또는 과오가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의 발효, 남북 정상간의 선언, 남북한간의 왕래, 교류, 협력 등의 실상을 도외시한 처벌은 정당성이 없다. 아직도 통일지향의 열망을 저해하고 기본권 제약의 위험을 주는 실정법이 남아 있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내란과 군사반란죄로 구속 처벌하였는가 하면, 민주화 유공자의 명예회복과 보상관계법의 제정,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의 설치,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 등은 민주화의 내실을 더욱 분명히 하는 획기적인 조치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숙제와 변호사의 사회적 책무

 

이제 한국은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시국사건 내지 정치범 때문에 변호사가 법정이나 교도소를 드나들어야 할 일은 없을지도 모르나, 변호사의 임무가 개별 사건의 변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조인은 기능적 역할에 안주하지 말고, 보편적인 가치 추구를 소흘히 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법정 밖에서 할 일은 많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유권적 기본권은 웬만큼 잘 보장되고 있으나, 이른바 사회권적 기본권의 확립과 인간의 존엄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평등사회의 건설은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어려움 못지않게, 그것을 지키고 북돋우며, 모든 사람이 그 가치와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만큼 힘든 그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법조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믿는다. 법조인은 이제 법정이라는 한정된 특수공간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가 직면한 역사와 상황의 한 복판에 서야 한다.

 

※위 글은 필자가 2008년 4월 15일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특별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사람과 언론>제7호(2019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