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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시평

부드러운 눈의 적설량에 비례하는 사랑의 깊이

부드러운 눈의 적설량에 비례하는 사랑의 깊이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꽃집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 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 사랑이란

저러한 대적(大寂)의 이력서다


장석남, 폭설

 

시방, 2018122일 일요일. 올해의 첫눈이 마구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호남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첫눈치고는 참말로 눈다운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연구실 창밖의 플라타너스, 벤치, 전북은행 옥상, 자동차, 단풍나무 위로 소리 없이 눈이 내려 쌓이고 있습니다.

 

고요하고 잔잔한 말씀처럼 내리는 눈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물들의 형태가 흔쾌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말 잘 듣는 초등학교 학생들처럼 지상의 모든 사물들이 한꺼번에 흰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하염없이 소담스런 눈이 내리는 캠퍼스 잔디밭에 여학생 몇이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날리며 눈싸움을 하다가 이제는 카메라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군요.

 

첫눈 오는 날, 그리운 사람 만나는 무기한의 약속날짜


저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될 이 순간의 행복이 펑펑 터뜨려지고 있습니다. 그 사잇길로 연인 둘이서 그들의 미래를 향하여 질서정연하게 발자국을 찍으며 길을 갑니다. 저도 그만 글 쓰는 일을 팽개친 채 누군가를 찾아 길을 나서고 싶기만 합니다.

 

아휴, 그러나 지금은 원고 마감을 지키기 위해 순결한 눈과의 연애를 애써 눌러 참을 수밖에 없군요. 하여 첫눈에 관한 기억 혹은 추억의 앨범을 뒤척입니다. 유년시절 첫눈이 내리면 매급시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거나, 언덕에서 비료푸대를 타거나, 바지가랭이가 다 젖을 때까지 토끼 잡는다고 눈 오는 숲속을 쏘다니거나 하며 눈 축제에 기꺼이 동참하곤 했지요.

 

그 때 그 시절. 그러다 청춘이 되면서부터는 첫눈 오는 날을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무기한의 약속날짜로 써먹곤 하였지요. 그래요. 그녀에게 앞으로 우리 헤어지더라도 해마다 첫눈 오는 날 저녁 여섯시, 덕진공원 취향정 앞에서 만나기로 하면 어때?” 그 때는 그런 말 자체의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반성합니다. 아직 한 번도 취향정에 나가 보지 않은 저를 진실로 반성합니다. 다만 첫눈이 올 때마다, 그 때 그녀와의 약속이 스스로 재생 부활하여 오늘의 순수한 사랑의 기표로 눈 내리는 것이라고 애써 믿습니다.

 

폭설을 통해 사랑의 본질과 속성을 형상화한 시

 

이 시는 폭설을 통하여 사랑의 본질과 속성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의도적인 시행가름을 통해 눈 내리는 풍경을 효과적으로 형태화하고 있군요. 예컨대 1연의 2, 3행에 보이는 긴 행 배열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의 시간적인 길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훌륭히 성취하고 있습니다. 1연은 밤 동안 내내 폭설이 아무 소리 없이 부드럽게 내리는 광경을 세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부드러움이 끊임없이 내려서 천근 만근이 되는 겨울 폭설의 생리는 사랑의 생리와 닮은꼴입니다. 그런데 그 겨울 폭설의 천근 만근 무게의 사랑은 그냥 그저 그렇게 오래 묵으며 산 죄밖에 없는 소나무 가지를 꺾고 또 찢고 마는군요. 그래요. 부드러운 사랑의 힘이 차근차근 적설하면 그 굵고 단단한 소나무 가지까지도 꺾고 찢는 위력을 지니는 것이겠지요. 올해도 천지간에 우지끈 우지끈 우리들 사랑의 적설로 찢어지는 소나무의 비명 소리 낭자한 겨울이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내리는 눈 아래 모든 사물들이 한 켜 한 켜 아니 한 자 두 자 높이의 적설에 고요히 파묻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없는 사랑의 비명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치환하여 듣는 사랑의 방법을 연마해야겠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사랑의 내공이 쌓인 연후에는 굴뚝새가 되어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는 방법도 좋겠지요마는 기꺼이 사랑의 폭설과 맞짱뜨며 눈보라 속 나는 괄괄한 송골매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부드러운 사랑의 폭설에 가지가 찢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부드러운 사랑의 폭설로 그대의 가지를 꺾는 전령사가 되는 것은 또 어떨런지요.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 고즈넉이 순종하고 싶은 심정

 

연구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그 어둠 속으로 눈발이 더욱 굵어지고 있습니다. 미끄러운 길 때문에 빨리 귀가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잘 진행되지 않는 글발 때문에 더욱 심란한 이 겨울 저녁. 휴대폰의 진동 신음소리와 더불어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군요. “재난 문자 방송. 소방방재청 통보. 16:15분 현재 폭설로 전주 광주간 호남고속도로 양방향 통제. 우회하시기 바람.” 가끔 가다 저는 폭설이든 폭우든 자연 현상으로 인해 두절 감금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 고즈넉이 순종하고 싶은 심정인 것이겠지요. 아니 세상과의 관계가 일시 정지되는 맛을 보고픈 것이겠지요. 만해가 말했듯이 사랑하는 것보다 복종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야요의 피학적 사랑의 맛을 알아야, 사랑의 폭설이 보여주는 대적(大寂)의 이력서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도달할 수 있겠지요. 사랑의 깊이는 부드러운 눈의 적설량과 비례하는 것이란 비밀의 문턱 앞에.    

/<사람과 언론> 제3호(2018년 겨울호)에 실린 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