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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시평

코로나 스쳐가는 가을, 도원에서 삶의 본색을 바라보다

시평

가을 복사나무들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수원 주인도 아무 일 안 하는 듯하다

봄을 좋아하는 그는 남반구에 가 있다고 한다

거기서도 다른 도원을 갖게 된다면 그의 노동은 쉴 날이 없을 것이다

이 가을, 북반구의 도원에는 지켜야 할 것도, 지켜보아야 할 것도 없다

복사는 없고 나무만 있다. 나무만 살아 있다

복사꽃이 없는데, 복숭아가 없는데도

이곳을 도원이라 불러 좋을까

그래, 아무도 딴소리 못할 도원, 지난 봄날의 도원을

가득 채웠던 분홍빛은 이제 행방이 없다

애초 그 빛깔은 복사나무의 본색이 아니었다

복사꽃의 그 빛깔, 벌레를 위한

복숭아의 그 빛깔, 짐승을 위한

지금은 저 깊어진 초록이 복사나무의 본색

그것은 무릇 나무들의 본색, 이 별의 낮은 데를 가득 채운 물의 본색

결국 이 별의 본색, 이 별이 이 별에

온기를 주는 불의 근원과 만나는 색

가을 복사나무들은 잎을 돌본다 

잎은 가을볕과 가을비를 버무려 가지 끝, 첨단을 새로 만든다

복사나무에게는 아직 내년 봄이 있으므로

지금 비록 복사꽃도 복숭아도 없지만

내년 봄은 다르므로, 그럴 것을 믿으므로

살아있을 이유를, 미리 만드는 꽃눈에 새긴다

한창때가 한참 지난 나는

흉터 같은 주름살을 매만지며 왜 지금껏 살아 있을까

내게도 봄 같은 게 더 남아 있을까

이 삶을 잘 참고 마무리하면 내게도

일터, 도원 한켠에 자리 하나 생겨 있을까

가을 복숭아밭은 가없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듯하나

지금 휴식과 준비로 침묵하는 것

본색으로 들앉는 시간이 없다면

이 눈먼 세월을 무슨 수로 감당하랴 

 

-이희중, 「가을, 도원(桃園)에서」 전문-

 

"소통의 자유 맛본 인류, 억압과 불통의 답답함 견디는 고통을 묵언수행 중"

 

지구라는 혹성을 좌충우돌 강타한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지나갈 들녘에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당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창한 이 가을에도 인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미세한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속수무책 난타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이러스의 물리적 실체를 육안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난망한 상황입니다.

 

기껏 숙주이자 전염원인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희석시키는 초보적인 전략만이 능사입니다. 하여 물리적 거리두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배타적 관계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존재의 호흡 혹은 비말을 가로막는 마스크의 착용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수상한 전염의 혐의를 장착한 눈초리로 흘낏거리는 관계인 것이지요.

 

결국 불가역적인 최종의 퇴치 방식으로는 화학적, 약학적 대응만이 첩경인 것이지요.

그리하여 인류는 치료제와 백신의 개발을 총력 경주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더디기만 할 뿐이어서 인류는 좌불안석의 엉거주춤한 상황입니다.

 

다만 인류는 이와 같은 코로나 팬데믹을 맞아 그 발병원인을 분석함과 동시에 저간의 삶에 대해 성찰 중입니다. 먼저 인류는 동물의 가혹한 살상에 대해 주목합니다. 대표적으로 박쥐의 식용화가 주범으로 등장합니다. 인수공통전염병의 창궐을 반성합니다. 나아가 인간의 무차별적인 식도락의 탐닉을 자성하고, 경고의 의미로 읽어냅니다. 더욱 확장하면 인간과 동물의 동반, 반려, 공생의 생태논리를 자각합니다.

 

인체를 숙주로 한 전염의 확대는 인류의 활발한 교류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의 기본 방식으로 교류의 절제와 차단이 채택됩니다. 인간들 사이의 일정한 거리감 유지가 필수적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세계는 금세기 과학과 교통의 급속 발전을 통해 역동적인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에는 발생 지역만 봉쇄하면 어느 정도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물론 세계화와 자유주의가 일상이 된 지금도 나라별로, 지역별로 이동과 교류와 소통을 억제하고 차단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리하여 이미 소통의 자유를 맛본 인류는 억압과 불통의 답답함을 견디는 고통을 묵언수행 중이지요.

 

심지어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들 예언 중이지요. 말하자면 코로나 이전의 자유로운 소통의 삶은 억제될 것이고, 이후의 비대면과 온라인을 통한 소통방식이 대세일 것이라고요. 이로 인한 삶의 변화의 핵심은 차갑고 냉혹한 비인간화의 도래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활발한 사회적 관계, 즉 교호작용을 통해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지속하여 왔지요. 그러나 교류의 제한과 소통의 억압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통섭의 발전은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물론 인류는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소통과 교류의 미디어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들 사이의 스킨십이지요. 예컨대 진정한 마음의 교류 말입니다.

 

"언젠가 소멸하리라는 낙관적 태도, 내면의 자유와 희망 기르는 것 중요“

 

세계와 상황이 변화하여도 항상적인 것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인류애라 할 수 있습니다. 전 지구촌을 강타한 역병의 창궐에도 인류는 공통의 적, 코로나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하여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평화로운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며 연대의 힘으로 밝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정신과 영혼의 다스림입니다.

 

지구에 잠시 세 들어 사는 인간은 역병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마음의 자세를 수련해야 합니다. 그것은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훈련입니다. 오늘의 바이러스 장애도 일시적인 것이므로 언젠가는 소멸하리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지요. 즉 내면의 자유와 희망을 기르는 것입니다.

 

“계절의 순환처럼 인생 역시 순환하는 것”

 

이 시는 가을, 도원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봄과 여름의 계절을 통과하고 난 뒤의 가을 복숭아 과수원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복숭아나무는 봄에 복사꽃을 환하게 피워 올린 뒤 열매를 맺고, 여름에 햇빛과 바람과 비의 상호작용을 통해 과일을 성숙하기 위한 노동을 치러 냈습니다.

 

계절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이법에 충실한 생의 과정을 치러낸 것이지요. 시인은 봄과 여름의 삶을 치러낸 복숭아 과수원의 가을 휴식 속에 잉태한 내년의 봄을 읽어냅니다. 더불어 자신의 삶을 얼비쳐 성찰합니다. 나아가 인생의 본질에 대해 천착합니다. 계절의 순환처럼 인생 역시 순환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인생의 “본색”/본질임을.

 

가을 복사나무들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수원 주인도 아무 일 안 하는 듯하다

봄을 좋아하는 그는 남반구에 가 있다고 한다

거기서도 다른 도원을 갖게 된다면 그의 노동은 쉴 날이 없을 것이다

시인은 가을 도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해의 노동을 마무리한 복사나무의 휴식을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휴식 중인 복사나무들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그러나 복사나무는 “-- 것처럼 보이는” 이면에 무슨 일인가 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코로나로 인해 어찌할 수 없이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내면에서 충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심지어 과수원 주인도 휴식을 취하고 있네요. 그는 현재 봄의 계절인 ‘남반구’에 휴가를 가 있지만, 화자는 혹시 그가 그곳에서 노동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네요.

이 가을, 북반구의 도원에는 지켜야 할 것도, 지켜보아야 할 것도 없다

복사는 없고 나무만 있다. 나무만 살아 있다

복사꽃이 없는데, 복숭아가 없는데도

이곳을 도원이라 불러 좋을까

 

“세계와 존재 모두 비어 있음의 상태인 허무를 이야기”

 

봄과 여름의 노동을 마친 가을날의 “북반구 도원”에는 “없는 것”만이 있습니다. 역설이지요. 복숭아과수원 즉 세계에 ‘없는 것’의 목록은 “복사꽃, 복숭아”와 같은 실물입니다.

 

또한 화자의 내면/심리에 ‘없는 것’의 목록은 “지켜야 할 것, 지켜보아야 할 것”이라는 애정의 대상입니다. 이는 세계와 시적 자아 모두에 부재하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어찌 보면, 세계와 존재 모두 비어 있음의 상태인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없는 것투성이 사이에 오로지 복사나무만 존재합니다. 그것도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부재와 존재의 대립이 유지되는 “도원”/복숭아과수원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상이지요. 하여 시인이여. 지금은 없지만 미래에는 있을 것이기 때문에 도원이라 호명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아무도 딴소리 못할 도원, 지난 봄날의 도원

을 가득 채웠던 분홍빛은 이제 행방이 없다

애초 그 빛깔은 복사나무의 본색이 아니었다

복사꽃의 그 빛깔, 벌레를 위한

복숭아의 그 빛깔, 짐승을 위한

 

화자는 자문자답합니다. 타자들이 인정하는 “도원”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던 지난 봄날의 복숭아과수원이라고요. 그러나 그 봄날의 복숭아과수원은 계절이 바뀌어 가을인 지금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원”은 절대불변의 항상 존재하는 고정체가 아니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체라는 것이지요. 나아가 봄날의 “분홍빛”은 복사나무의 “본색”이 아니었음을 자각합니다. 복사꽃 혹은 복숭아의 분홍빛은 오로지 벌레와 짐승을 위한 일시적 색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화자는 복숭아나무의 본질을 색깔 탐구를 통해 사유합니다. 그리하여 도원의 주체는 복숭아나무이고, 복사꽃과 복숭아는 주변체라는 인식으로 나아갑니다. 주체와 객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시인은 질문을 던집니다. 복숭아과수원의 주체는 복숭아일까요. 아니면 복숭아나무일까요. 이를 변용하여 질문하면, 삶은 과정일까요. 결과일까요. 다양하고 심도 있는 철학적 사유와 논의가 필요한 화두이지요.

 

지금은 저 깊어진 초록이 복사나무의 본색

그것은 무릇 나무들의 본색, 이 별의 낮은 데를 가득 채운 물의 본색

결국 이 별의 본색, 이 별이

이 별에 온기를 주는 불의 근원과 만나는 색

화자는 가을의 도원에서 세계의 본질에 대해 정의합니다. 역시 색채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본질을 파악합니다. 분홍빛은 벌레와 짐승을 위한 봄날의 일시적 색깔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초록”이 복사나무의 “본색”/본질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유는 연쇄를 거쳐 확장되어 나아갑니다.

 

“초록”은 복사나무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나무의 본색이라고요.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낮은 곳”에 존재하는 “물”의 본색이라고요. 아니 더욱 확장하여 “이 별”/이 세계의 본색이라고요. 심지어 ‘물’의 상대적 속성을 지닌 ‘불’의 근원과 화응하는 본색/본질이라고, 활달한 상상력의 힘을 빌려 궁극적 정의를 이끌어냅니다.

가을 복사나무들은 잎을 돌본다. 잎은

가을볕과 가을비를 버무려 가지 끝, 첨단을 새로 만든다

복사나무에게는 아직 내년 봄이 있으므로

지금 비록 복사꽃도 복숭아도 없지만

내년 봄은 다르므로, 그럴 것을 믿으므로

살아있을 이유를, 미리 만드는 꽃눈에 새긴다

 

“가을 도원, 휴식과 노동 공존하는 정중동의 상황으로 다가와”

 

지나간 봄과 여름의 노동을 갈무리한 가을 도원에 분홍빛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분홍빛 존재들은 벌레와 짐승을 위해 어디선가 복무할 것입니다. 시방 가을 도원에 복사나무들은 초록의 본색을 드러낸 채 묵상 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섭리를 알고 있습니다. 올해의 노동 끝에 당도한 복사꽃과 복숭아의 상실은 기실 운명이라는 점을.

내년이면 분명코 또 다시 복사꽃과 복숭아가 열매 맺으리라는 점을. 그리하여 복사나무들은 미래를 위하여 “잎”을 돌봅니다. 그 잎은 가을의 햇볕과 비를 갈무리하여 내년의 “첨단”을 꿈꿉니다.

 

시방 상실의 계절 가을에, 복사나무는 내년이면 반드시 돌아오고야 말 성숙과 충만의 계절 봄과 여름을 마중하기 위하여 휴식의 노동을 치르고 있습니다. 내년의 봄이 필연코 환원하리라는 신념은 복사나무를 비롯한 모든 존재의 삶의 이유이자 조건입니다. 그리하여 가을 도원은 휴식과 노동이 공존하는 정중동의 상황으로 다가옵니다.

 

한창때가 한참 지난 나는

흉터 같은 주름살을 매만지며 왜 지금껏 살아 있을까

내게도 봄 같은 게 더 남아 있을까

이 삶을 잘 참고 마무리하면 내게도

일터, 도원 한켠에 자리 하나 생겨 있을까

 

화자는 가을 도원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세계의 본색/본질을 요리조리 궁리한 바 있습니다. 마침내 그는 시선을 세계로부터 자아/존재로 이동합니다. 아마도 “한창때”인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턱쯤에 앉아 있을 “나”/자아는 삶/존재에 대해 성찰합니다. 그가 지나온 계절 봄과 여름은 복사꽃이나 복숭아 대신 “흉터 같은 주름살”을 결실하고 있네요. 그는 주름살 같은 세월을 회상하며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를 곰곰이 반추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제시되는데요.

 

하나는 설렘과 환희를 자극하는 “봄 같은 게” 여전히 상존할까 하는 우려이고요. 또 하나는 이 가을의 삶을 견디고 잘 마무리하면 “도원”/세계에 삶의 이유를 담보하는 공간이 존재할까 하는 회의이네요. 그러고 보니 화자의 이러한 우려와 회의는 사실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미래를 응시하는 것이었네요. 즉 살아온 이유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한 모색이었던 것입니다.

 

가을 복숭아밭은 가없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듯하나

지금 휴식과 준비로 침묵하는 것

본색으로 들앉는 시간이 없다면

이 눈먼 세월을 무슨 수로 감당하랴

 

“코로나는 스쳐 지나가는 소소리바람일 뿐”

 

이윽고 세계에 대한 관찰로부터 자아의 내면을 성찰한 화자는 세계와 존재를 통섭합니다. 겉보기에 가을 복숭아밭은 허송세월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면 가을 도원은 “휴식과 준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지요.

현재의 휴식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나아가 가을 도원은 “침묵” 중입니다. 이는 깊고 무거운 성찰을 통해 내일의 충일한 발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또한 가을은 “본색으로 들앉는 시간”으로 변주됩니다.

 

모든 존재에게 인생이나 세계의 본질을 천착하는 시간은 자아를 더욱 단단하고 향기롭게 성숙하도록 이끕니다. 그리하여 가을은 불가사의하고 불확정적인 미래의 “눈먼 세월”을 감당하고, 또 건너갈 수 있는 힘을 충전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마침내 이 시의 가을 도원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존재 혹은 인생의 본색/본질을 함의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일체화를 형성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침공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휴식 중입니다. 이 시를 빌어 말하자면, 우리는 복사꽃과 복숭아를 상실한 가을의 도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올해의 도원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는 가을 햇빛, 내면의 욕망을 거풍하는 소슬한 가을바람, 우주의 심연을 우러르는 맑고 푸짐한 뭉게구름으로 장관입니다.

 

복사나무는 여전히 내년의 복사꽃과 복숭아를 꿈꾸며 “본색”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초록”의 본색으로 미래의 “분홍빛”을 위하여 휴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초록빛 인생의 본색/본질을 사색하며, 내일의 맑은 하늘과 비옥한 들판을 가꾸기 위하여 잠시 휴식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다보면, 바이러스는 바이러스대로 나름의 분주한 노동을 마치고 필연코 휴식에 들지 않겠어요. 코로나는 스쳐 지나가는 소소리바람일 뿐이니까요.

 

/양병호(전북대 국문과 교수, 시인) /<사람과언론> 제10호(2020년 가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