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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강준만 칼럼

<강준만 칼럼>‘금의환향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금의환향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우리 문화에서 은퇴한 많은 남성들, 특히 예순이 넘은 남성들은 나이를 먹은 덕에 가부장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결과 극심한 외로움, 소외, 의미의 위기, 혹은 그 밖의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감정적 자아가 발달한다. 그들은 나이 든 세대로서 젊은 남성에게 일에 관한 가부장적 믿음이 틀렸음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


최근 벨 훅스의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이라는 책을 읽다가 반가운 마음에 밑줄을 그은 대목이다. 왜 반가웠을까? 내용도 좋았지만, 세간의 속설과는 달리 나이 먹은 사람의 생각이 유연할 수 있음을 역설한 게 반가웠다. 미국 이야기라곤 하지만, 한국의 노인들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비록 드러내놓고 표현은 하지 않을지라도, 기존 가부장제에 대한 의구심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늙은 사람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건 노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반가움을 느끼는 건 내가 이젠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나이를 먹어가고 있으며 그걸 늘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엔 무심코 넘겼을 신문 기사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잦아졌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칼럼이다.


은퇴한 동창을 만났더니 헬스클럽 열심히 다닌다면서 너도 빨리 헬스 등록해. 육십 전에 등록하면 육십 넘어도 계속 다닐 수 있지만 육십 넘기면 등록을 아예 안 받아주거든이라 했다. 나이 든 사람이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경로(敬老)는 점점 사라지는 사회다.”


경로? 허황된 꿈이다. 지난해 '태극기·촛불'로 상징되는 세대 간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노인에 대한 혐오가 더 증폭돼 '틀딱(틀니를 딱딱거리는 노인을 비하)'처럼 20·30세대를 중심으로 노인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니, 어찌 감히 경로를 넘보랴.


이실직고를 하자면, 나 역시 자주 할아버지로 불리면서도 할아버지들을 폄하하는 데에 일조를 해온 사람이다. 나는 사석에선 자주 노인네들 다 물러나야 돼!”라는 말을 해왔으니 말이다. 그 발언의 맥락을 말씀드리자면,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임명할 수 있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적 자리에 연고와 정실에 따라 노인네들 앉히지 말고, 과감하게 30대 젊은이들을 발탁해 우리 지역에 활력과 박력을 불어넣자는 취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네들은 집에서 죽은 듯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훅스의 말마따나, 기존의 일에 관한 가부장적 믿음만 버리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물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은퇴하기 전 내로라 하는 직장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이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누추한일들에 열심히 임하는 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잇는 풍경이다. 나는 이것 역시 앞서 말한 노인의 유연 사고의 파워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의 문제를 깨닫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노인이 온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점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엔 자신의 경험을 사심 없이, 현재에 적용할 수 있게끔 제시하지 않은 노인의 책임도 있겠지만, 지역의 공적 사안들이 주로 사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한국 지방자치의 오래된 폐습이 더 큰 이유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이 내게 이익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 그 어떤 역사적 경험과 지혜라도 쓰레기 취급을 받을 게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또 하나의 쓰레기를 만드는 일일지라도, 이른바 꼰대질의 유혹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이건 너무도 중요하거니와 절박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수없이 해왔던 이야기지만, 이젠 어법을 좀 바꿔서 이야기해보련다. 어법을 바꾼다는 건 이른바 사회적 증거(social proof)’의 원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뜻이다.


사회적 증거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믿음은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컨대, 어느 대학 당국이 교내 기숙사에서 음주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너무 많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면 오히려 음주 문제를 줄이기는커녕 더 증가시킬 확률이 높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이라는 사회적 증거를 제시한 셈이니, 규정을 위반해도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20여년 전 [서울대의 나라]라는 책을 출간해 서울대 패권주의를 고발했지만, 지금 이 주제로 책을 쓰라면 정반대의 방향으로 쓸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서울대 패권주의를 깨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아 서울대 패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네!”라고 느끼면서 그걸 어떻게 해서건 내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사회적 증거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20년전 [지방은 식민지다]는 책에 이어, 3년 전에도 [지방식민지 독립선언: 서울민국 타파가 나라를 살린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사실 현 서울공화국체제에 너무도 화가 치밀어 쓴 책들이었지만, ‘사회적 증거의 원리에 따르자면, 지방의 탈민식민지화에 도움이 안 되는 책들이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지방이 식민지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건 이 식민지를 탈출해 서울로 가야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나는 개인적으론 지방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서울 생활을 끔찍하게 여길 정도로 대만족이다. 그러나 그간 이걸 강조하긴 어려웠다. 국립대 교수라는 철밥통 혜택을 누리는 자가 먹고 살기 힘들어 하는 지방민들의 고통을 아느냐는 힐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밥통 혜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중에서도 지방, 특히 전주에서의 삶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 이게 나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그래서 앞으론 전주에서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걸 역설하는 방향의 책을 써볼 생각이다.


사실 이런 사회적 증거의 문제는 지방에서 자주 나타난다. 전북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전북 인구는 1966252만명이었는데, 그간 한국의 인구증가율 기준으로 환산하자면 2018년 현재 400만명이 넘어야 한다. 하지만 전북 인구는 이제 180만명대로 줄었고, 지금도 매일 60명꼴로 줄고 있다. 돈 벌어 성공해서 떠나는 게 아니다. 대부분 먹고 살 길이 없어 전북을 떠나는 거다. 그들 중 상당수가 수도권 빈민으로 살고 있지만, 그 구체적 실태는 조사된 바 없다. 제발 국가인권위원회라도 나서서 그들의 인권 실태를 조사해보면 좋겠다.


그런데 미디어를 비롯하여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대부분 고향 떠나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다. 지역언론은 정부 인사가 있을 때마다 심혈을 기울여 전북 출신을 찾아내 그 수가 적으니 많으니 하는 타령을 해댄다. 그 수가 많으면 전북이 잘 되고 적으면 전북이 망한다는 식의 전제하에 해대는 눈물겨운 뿌리 찾아내기 운동이다. 과거 일부 정권들은 이걸 귀신같이 꿰뚫어보고 뿌리 찾아내기 운동에 동참해 어거지로 서울 사람을 전북인으로 둔갑시켜 지역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면죄부로 활용하기도 했다.


지역 언론의 주요 메뉴 중의 하나는 서울 가서 성공한 전북 출신 유명 인사들을 다루는 것이다. 그들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전북이 잘 된다고 믿는 신앙은 금의환향(錦衣還鄕)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고하다. 그들은 환향할 뜻이 전혀 없건만, 그래도 우리 전북인이라는 범주에 넣어 자위를 해보려는 몸부림이 치열하다. 이 치열한 몸부림은 지역의 교육정책으로 이어져 우수 인재를 서울 소재 대학들로 보내기 위한 운동으로도 나타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슬로건 아래 스스로 지역, 특히 지역 대학을 비하하고 사실상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그걸 지역인재육성정책이라고 부르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그런 금의환향 이데올로기를 애써 좋게 해석하자면 긍정적 사고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긍정적 사고가 한 방향으로만 작동한다는 게 문제다. 지역의 현실에 대해선 부정적 사고일변도이니 말이다. 지역 언론은 수시로 각종 통계 지표들을 활용해 전북이 전국에서 최하위권에 속하는 낙후 지역임을 강조한다. 물론 그거야 앞으로 잘 해보자는 뜻에서 자극을 주기 위한 좋은 의도이겠지만, 문제는 지역과 지역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기사는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북에서 탈출하는 게 현명하다는 사회적 증거를 끊임없이 제시함으로써 그렇게 하라고 등을 떠미는 선전선동의 결과를 낳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전북엔 일자리가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세상은 경제 논리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다. 심리적 증폭이 더 무섭다. 자꾸 인구가 주는 데 일자리가 생길 리 만무하다. 평범한 삶이 아름답다는 의식과 문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소확행(小確幸·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정신이 확산되고 정착될 때에 전북의 가치도 살아나고 돋보이게 되는 것이지, 모든 걸 서울특별시 기준으로 해보겠다며 그 과정에서 자기 비하를 하게 되면 오히려 잘 살던 사람마저 서울로 내쫓는 역설이 일어난다.


뿌리 중심의 금의환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어느 지역 사람이건 전북으로 불러 들여 전북인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는 발상의 전환과 더불어 그에 걸맞는 정책적 변화를 시도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선전선동을 열심히 해보는 게 어떨까? 이건 지역 미디어와 더불어 노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삶의 지혜를 이미 깨달은 젊은이들은 전북에 남으려고 애쓰는데, 주변에서 너 정도면 서울갈 줄 알았는데.....”라는 식으로 루저 취급하는 이 엽기적인 자학의 문화를 이젠 끝장낼 때가 되었다.

/<사람과 언론> 창간호(2018년 여름)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