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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강준만 칼럼

왜 마음에 없는 칭찬이라도 장려해야 할 미덕인가?: 칭찬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강준만 교수

“아첨은 쉽지만 칭찬은 어렵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수많은 유명인들이 칭찬에 대해 멋진 말들을 남겼습니다만, 양과 질에서 모두 압도적인 명언을 남긴 이는 17세기 프랑스 작가로 풍자와 역설의 잠언으로 유명한 라 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가 아닌가 합니다. 그의 명언들을 몇 개 감상해볼까요? 

 

 “칭찬에 손사래를 치는 건 한번 더 칭찬받고 싶어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상대를 칭찬하는 것은 상대에게 칭찬을 되돌려 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는 칭찬보다는 자신에게 유익한 비판을 선호할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종종 칭찬이란 수법을 통해서 그런 식이 아니면 감히 폭로할 수 없는 그 사람의 결점을 교묘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른바 독을 넣은 칭찬이란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은 그 장점을 귀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장점을 찾아낸 자신의 감각을 높게 평가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모두 다 독한 말이지만, 다음 말은 유일하게 칭찬에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려는 욕망이 우리의 덕성을 키워주는 것처럼 재능과 지혜와 아름다움도 칭찬받을수록 더 커진다.”


 “모든 사람을 탓하거나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건 모두 멍텅구리 짓이다.” 미국 정치가이자 발명가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말입니다. 칭찬이나 비판은 ‘선택의 게임’이지요. 칭찬을 하건 비판을 하건 그렇게 할 만한 누군가를 골라서 해야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늘 비판만 하거나 늘 칭찬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효과가 없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정신상태나 성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겠지요.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은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셈이다.”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말입니다. 늘 습관적으로 모두를 향해 칭찬만 하는 사람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인 것 같네요. 사람이 너무 좋아서일까요? 아니면 뭔가 불안해서 그러는 걸까요? 아무리 뜻이 좋다 한들, 칭찬을 남발하는 사람의 칭찬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첨은 쉽지만 칭찬은 어렵다.” 독일 작가 장 폴 프리드리히 리흐터(Jean Paul Friedrich Richter, 1763-1825)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첨은 입으로 하는 것이지만 칭찬은 머리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칭찬의 말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부하에게서 “각하, 저는 각하께서 칭찬받기를 싫어하시는 그 점을 너무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듣자 매우 흐뭇해 하면서 감탄했다고 합니다. 사실상의 아첨일망정 고난도의 칭찬을 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비판을 하지 말고 칭찬을 하라”

 

 “책망이 칭찬보다 안전하다.” 미국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말입니다. 칭찬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책망에도 책임이 따르지만, 칭찬보다는 훨씬 덜 하지요. 책망을 당한 사람이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그건 책망 덕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칭찬을 해준 사람이 실망을 주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칭찬을 한 사람에게 내내 부담이 되지요. 칭찬보다 책망이 훨씬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나는 찬사를 받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매번 사람들이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말입니다. 그가 동시에 “칭찬하면서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 것도 바로 그런 칭찬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칭찬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트웨인의 의구심이 가슴에 팍 와닿을 겁니다. “정말 그런가?” 하고 뭔가 불안해지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칭찬으로 인해 우쭐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더 많은 칭찬을 받기 위해 애를 쓴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요? 다만, 그러다가 ‘착한 사람 신드롬’에 빠져 칭찬을 받기 위해 사실상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해서 말입니다. 

 

처세술 전문가들은 “비판을 하지 말고 칭찬을 하라”고 외쳐대는데, 이 방면의 대가는 단연  미국 처세술 전문가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1888~1955)입니다.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인정욕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칭찬을 좋아한다”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말, “인간 본성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인정받으려는 갈망이다”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말이 인용됩니다.

심지어 딜린저라는 은행강도가 FBI의 추적을 받다가 한 농가에 뛰어 들어가 “난 너를 해치지 않겠다. 다만 나는 딜린저다”라고 말했다는 것까지 소개됩니다. 은행강도가 자신이 공적 제1호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우리 인간의 인정 욕구가 강하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남을 칭찬하라는 겁니다. 이를 위해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성공사례까지 동원됩니다. “카네기는 자신의 직원들을 남몰래 칭찬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도 칭찬했다. 카네기는 묘비에까지 직원들을 칭찬하길 원했다. 그는 스스로 비문을 썼다. 그 내용은, ‘여기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변에 끌어 모으는 법을 알던 사람이 잠들었다.’”

카네기는 영국왕 조지 5세가 버킹엄궁의 서재에 걸어놓은 금언들도 인용합니다. 그 중 하나가 “값싼 칭찬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입니다. 카네기는 그 격언 말미에 “값싼 칭찬, 바로 그것이 아부다”라고 덧붙입니다. 물론 그는 거듭해서 사실상의 아부를 옹호하지만, 아부를 하더라도 값싸게 하지 말고 비싸게 하라는 게 그의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사이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경멸하면서도 공개적으론 서로 칭찬하는 위선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가리켜 mutual admiration society라고 합니다. 직역을 하자면, ‘서로 칭찬하는 집단’ 또는 ‘서로 칭송하는 사회’이지만, 위선을 꼬집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미국의 초월주의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가 1851년 처음 이 말을 썼을 땐 상호 존중을 강조하는 긍정적 의미였지만, 오늘날엔 그 의미가 위와 같이 변질되었지요.

 

그러나 1980년대 미국에 불어 닥친 아이들의 자존감 키워주기 열풍 이후 또 한번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로이 바우마스터(Roy F. Baumeister)는 “아이들이 ‘난 정말 잘해’라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용기를 줌으로써 학업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수백만 부모들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칭찬을 쏟아 붓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포츠팀의 코치는 승자뿐 아니라 모든 아이가 트로피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걸스카우트는 ‘독창적인 나!(uniquely ME!)'라는 프로그램을 창조해냈다. 학교에서는 자신의 가장 멋진 점을 열거하고 친구들끼리 서로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토론한다. ’서로 칭송하는 사회‘는 한때 험담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그것을 마치 사회적 규약처럼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200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대대적인 ‘칭찬 하기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 선두 주자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2003), [칭찬은 아기 고래도 춤추게 한다](2009) 등의 베스트셀러를 낸 경영컨설턴트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입니다. 칭찬이 정말 고래와 아기고래까지 춤추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칭찬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일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떠돌던 속설이었지요. 그런 속설의 대표적 주인공으로 거론되는 이가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지요. 이 감동적인 이야길 잠시 음미해볼까요?

 

1852년 가을, 러시아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1818-1883)는 집에서 별 생각 없이 [현대인]이란 잡지를 집어 들었다가 이 잡지에 실린 어느 무명 작가의 <어린 시절>이란 단편소설에 푹 빠져 들었습니다. 투르게네프는 이 무명작가에게 칭찬의 말로 격려를 해주고 싶어 그의 주소를 알아보던 중 그의 고모를 찾아내 찬사를 대신 전했습니다. 고모는 조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너의 첫 번 째 소설에 대한 반응이 좋은 것 같아. 글쎄 [사냥꾼의 수기]를 쓴 유명한 작가 투르게네프 씨가 가는 곳마다 너를 칭찬하신다는구나. 그는 나에게 ‘이 청년이 계속 글을 쓴다면 전도가 유망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단다.” 

당시 자포자기 상태에 놓여 있던 톨스토이는 투르게네프의 칭찬에 고무되어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아는 톨스토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렸을 때 선생님의 칭찬에 자극을 받아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걸로 보아 칭찬의 힘이 대단할 수도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과분한 칭찬일지라도 죄악은 아니다” 

 

물론 칭찬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Marshall B. Rosenberg)는 “칭찬은 아무리 긍정적일지라도 남에 대한 판단일 경우가 많다. 감사는 통제가 아닌 축하의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국 교육학자 로버트 케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우 라헤이(Lisa Lakow Lahey)도 “긍정적인 칭찬일지라도 타인을 자기 식대로 평가하는 칭찬은 ‘상대방은 어떤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주제넘은 일이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건 칭찬을 받고도 기분이 찝찝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경우의 칭찬은 ‘평가형 칭찬’일 경우가 많지요. 그렇다고 해서 칭찬을 멀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평가형 칭찬일지라도 조심스럽게 겸손한 자세로 말하면 상대방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일본 심리 카운슬러 이와이 도시노리는 [나는 더 이상 착하게만 살지 않기로 했다](2014)는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칭찬은 인간관계를 망친다.”고 주장하네요. 아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요? 그는 세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한번 칭찬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야 한다. 둘째, 칭찬할 때마다 칭찬하는 정도가 커지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진다. 셋째, 끊임없는 지시나 관리가 필요하다.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 역시 가끔 하는 칭찬은 괜찮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칭찬 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끔 ‘용기 부여’를 해주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 실천 방법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라는 것인데, 이건 칭찬이 아닌지 의문입니다. 칭찬을 남발하지 말라는 조언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야단을 맞아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된 사람보다 칭찬을 받고 착한 일을 하게 된 사람이 더욱 많다.” 영국 소설가 로버트 스미스 서티스(Robert Smith Surtees, 1805-1864)의 말입니다. 이 말을 인용한 미국 저널리스트 리처드 스텐걸(Richard Stengel)은 “누군가를 격려할 목적으로 지나치거나 과분한 칭찬을 해줄 때가 있는데, 그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에 없는 칭찬인들 어떠랴! 마음에 없을지라도 칭찬은 칭찬이지 않는가.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오늘날 과도한 칭찬은 고사하고 칭찬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연예인 등 유명인사들을 우스꽝스럽고 천박하게 추켜세우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지만 나는 넘치는 칭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칭찬을 주장하는 것이다. 칭찬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아낌없이 칭찬해야 한다.”

 

이 주장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책망이 칭찬보다 안전하다곤 하지만, 그거야 주로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사적 인간관계에서 칭찬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닐까요? ‘넘치는 칭찬’이 아니라 ‘당연한 칭찬’을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바로 칭찬의 의도하지 않은 장점이 아닐까요?

/강준만(전북대 신방과 교수) /<사람과언론> 제10호(2020년 가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