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강준만 칼럼

왜 후안무치는 정치인의 필수 덕목인가?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정치인의 경쟁력이 된 후안무치(厚顔無恥)

 

“아는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치인의 자질이 충분하다.”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말이다.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똑같다. 그들은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걸 꼭 연구를 해봐야 아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도리스 그레이버(Doris Graber)의 연구(1988)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가감해서’ 받아들이면서 일상적으로 무시한다. 유권자들의 이런 ‘지혜’가 오히려 정치인의 후안무치를 더욱 부추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급진화된 우파’로 통하는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한다. “철학이 말하는 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할 수 있는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슬로터다이크의 제안을 100% 넘게 초과달성한 인물이다. 트럼프의 ‘성공 사례’를 흉내낸 건지는 몰라도 한국에도 열성 지지자들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독설을 자주 내뱉고 성찰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적반하장(賊反荷杖)을 장기로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이들 중 일부는 시인 최승호(1954-)의 시(詩) <방부제가 썩는 나라>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족하다.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후안무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했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선 이해해보려는 자세를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는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치인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쇼의 말을 검토해보건대, 유권자들이 정치인에게 모든 걸 다 알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지적하는 게 공정할 것이다. 그런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래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뻔뻔함은 정치인의 필수 덕목이 되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보통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얼굴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 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고 하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질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후안무치의 평준화’의 평준화를 넘어서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날 것인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상대방의 요청이나 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는 게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시켜야 한다. 그러다보니 보통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갖고 있는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 라고 그러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되곤 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Al Capone, 1899-1947)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조폭마저 그럴진대, 일반 대중이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흔히 후안무치의 대표적 사례로 아줌마를 꼽는 이들이 있지만, 경향신문 기자 오광수의 이런 반론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 “빈자리를 향해 돌진하는 아줌마 /뻔뻔하다고 욕하지 마라 /그녀들은 내 어머니고 부인이다 /아줌마의 힘이 오늘을 있게 했다 /악착같이 일하면서 집 장만하고 /자식들 교육시키며 살아왔다 /관절염에 부인병 이젠 성한 데가 없다 /모든 영광은 지아비와 자식에게 돌리고 /상처투성이의 중성(中性)으로 남은 /거룩한 그대 이름은 아줌마” 남존여비(男尊女卑) 가부장 체제하에서 그간 억눌려 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결혼해 애 낳고나서 폭발했다면 왜 그렇게 됐는지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된다는 건 말이 안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정의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의 ‘뻔뻔’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이런 하향평준화식 사회정의를 원하는 건 아니잖은가.

조지 버나드 쇼는 “어리석은 인간은 부끄러운 짓을 할 때마다 그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목청 높인다”는 말도 했는데, 우리 모두 스스로 어리석음과 뻔뻔함을 키우면서 그걸 의무라고 목청 높여야만 하겠는가? 정치권의 후안무치가 대중의 일상적 삶에 스며들지 않도록 애써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후안무치하지 않아도 되는 정치를 불러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인을 위한 변명’

 

그렇게 하기 위해선 정치를 공정하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일 사회학자이자 정치가인 헤르만 셰어(Hermann Scheer, 1944-2010)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 정치는 어떻게 정치인을 망가뜨리는가](2003)에서 “정치 외의 분야에서 일어나는 보기 흉한 권력다툼은 대부분 감춰져 있는 반면 정치싸움은 여과되지 않고, 때로는 밀고에 의해 그대로 공개된다”며 이렇게 말한다. “정치인은 항상 그의 행동에 있어 특별히 더 투명하게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다른 행동 영역들, 즉 덜 공개적인 행동영역은 정치보다 더 존중받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사람들의 집단에는 흔히 하는 말처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어 셰어는 “많은 정치인들은 ‘눈에 띄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지 허영적인 자기 표현을 위한 동기로만 본다면 그들이 하는 말은 어떤 것도 진실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러한 고정관념은 모든 정치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에도 물론 절망, 방해공작, 모욕 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정치에만 국한 것이 아니다. 기업 내에서의 일상적인 경쟁, 특히 임원들 사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학계에서도 교수직, 연구 위임, 출판 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음모, 기회주의, 적대감 등이 있게 마련이다 공명정대한 정신이 강조되는 운동단체 안에서도 의장직이나 팀 편성에 있어 격투가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능력이나 착안, 성과 등을 무시하는 행동은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학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따돌림이 없는 직장은 없으며 정신적 부담과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이 없는 곳도 없다.”

 

‘정치인을 위한 변명’치곤 아주 훌륭한 변명이다. 셰어의 변론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는 건 정치가 미디어의 일용할 양식으로서 늘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 든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어떤가? 언론을 일컬어 행정·입법·사법에 이은 ‘제4부’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의 보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가 1787년에 처음 쓴 말이다. 오늘에 비해 민권의 힘이 약했던 18-19세기, 아니 20세기까지도 언론은 3부의 감시자였고 그래야만 했다. 언론의 사명은 오직 감시와 비판이었다. 3부를 포함해 사회의 어둡고 추한 것들을 찾아내 고발하는 데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으니, 뉴스는 곧 ‘나쁜 뉴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 <타임>을 창간해 언론제국을 세운 헨리 루스(Henry R. Luce, 1898-1967)는 “‘좋은 뉴스’는 뉴스가 아니며 ‘나쁜 뉴스’가 뉴스”라는 정의를 내렸고, 이 정의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언론인이 내면화한 가치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언론학자 타마 리브즈(Tamar Liebes)의 표현에 따르자면, 언론은 “규칙보다는 예외를, 규범보다는 일탈을,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조화보다는 불협화음”을 보도하는 걸 사명으로 삼아 온 것이다.

 

‘4지선다’ 캠페인을 벌여야 하나?

 

그러니 매일 그런 양식을 받아먹는 사람들이 어찌 정치를 좋게 볼 수 있으랴. 물론 정치가 욕 먹을 점이 많긴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아니 아예 구조적으로 욕받이 역할을 하게끔 돼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치는 텔레비전과 같은 운명이다. 텔레비전은 다른 고급예술과는 달리 칭찬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 주로 비판의 대상이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PD는 이렇게 항변한다. “텔레비전이 수요일에만 방송된다면 그건 기가 막히게 좋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어느 텔레비전 작가의 설명에 따르자면, 텔레비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쁘게 보이는 이유는 그 대부분의 것이 가시적(visible)이라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고급미술이라 하더라도, 일부러 화랑을 찾지 않고 그것이 텔레비전처럼 늘 도처에 편재해 있다면 그래도 그렇게 좋기만 하겠느냐는 이야기다.

 

텔레비전의 전성기라 할 1980년대 초반에 나온 말이지만, 수긍할 수 있는 점이 있다. 대중의 일상적 삶의 도처에 편재하는 건 아무래도 싸구려로 홀대받기 십상이다. 이게 바로 정치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모든 미디어는 정치 뉴스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다루지만, 거의 대부분의 뉴스가 부정 일변도이니 어찌 정치가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정치를 위한 변명을 한 김에 하나만 덧붙여보자. 리더십 전문가 진 립먼-블루먼(Jean Lipman-Blumen)은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리더들 틈에서는 성자를 찾으려 들지 마라. 성자들이 선거직이나 임명직을 좇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사람들은 정계나 기업 세계 같은 아수라장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법이다”고 말한다.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점이 있을 게다. 우리는 정치 근처에 아예 발을 들이밀지 않는 사람들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게 공정하지 않은가? 평소엔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고수하면서 정치인에게 당위와 사명을 강조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이게 참 딜레마다. 아주 괜찮던 사람도 막상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이상해진다. 우리는 주로 그런 개인을 비판하지만, 그게 어디 개인 비판으로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겠는가. 한 개인이 무슨 수로 기존 시스템과 관행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치 근처에 아예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속설이 굳어질수록 정치개혁은 어려워진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나름 잘 해보려고 하는 일부 정치인들도 피해자가 되고 만다.

 

이런 문제는 특히 지방에서 두드러진다. 일부 지역은 ‘1당 독재’ 체제인지라 더욱 그렇다. 나는 유권자들이 무소속 신인들에게 기회의 문을 좀 열어주는 게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오랜 세월 ‘2지선다형’ 선택에 중독돼 온 유권자들은 그럴 뜻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두 개의 답 가운데 하나에 대해선 강한 반감을 갖고 있기에, 이는 사실상 ‘2지선다형’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4지선다’나 ‘5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제발 공정한 ‘4지선다’ 마인드라도 가져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지역의 입장에선 배부른 소리다.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4지선다’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사람과언론> 제11호(2020년 겨울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