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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강준만 칼럼

왜 우리는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욕망할까? : 욕망

[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 욕구와 욕망은 구분없이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둘은 좀 다른 것이지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원한다면 그건 욕구(need)지만,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을 원한다면 그건 욕망(desire)입니다. 그간 수많은 사상가들이 욕망의 정체에 대해 많은 말을 쏟아 냈는데, 그 핵심은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인간의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본성에 의해 우리는 모든 것을 갈구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운명에 의해 우리는 이 모든 것 가운데 단지 일부만 얻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항상 불만족 상태에 놓여 있다.” 이탈리아 사상가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말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시절만 하더라도 욕망은 귀족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욕망의 신분적 위계가 무너지고 보통사람들도 욕망을 하게 되면서 욕망은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욕망하는 게 적고 두려워하는 게 많은 건 비참한 정신 상태다.”고 했지요.

 

욕망하는 게 적은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건 바로 욕망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아예 “인간은 욕망이다.”고 단언했지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네덜란드 철학자 베네딕트 스피노자(Benedict Spinoza, 1632~1677)의 말입니다. 그는 욕망을 인간 속박의 형식으로 보았지만, 욕망이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인정했습니다.

 

어떤 걸 좋아하기 때문에 욕망하는가, 아니면 욕망하기 때문에 좋아하는가? ‘닮과 계란’ 논쟁을 방불케 하는 이 고전적인 물음에 스피노자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이건 기존 욕망이론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도전은 훗날 스피노자가 혁명적 사상가로 예찬받는 근거가 되었다지만, 어떤 게 먼저인지를 구분하는 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좋아하다 보면 욕망하고, 욕망하다 보면 좋아하고, 좋아하니 욕망하는, 이 끝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먼저인지 헷갈리기 마련이지요.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필요를 충족시키는 금욕주의 방식은 신발이 필요할 때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 영국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의 말입니다. 스위프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금욕주의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욕망을 가져봐야 자신만 괴롭기 때문에 차라리 금욕의 습관을 갖는 게 더 낫다는 현실적인 처방을 내린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모든 성취의 출발점은 욕망이다”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인간불평등기원론](1755)에서 사유재산 제도로 인한 욕망의 증가가 불평등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생활양식에 내재해 있는 온갖 병폐들, 즉 증오, 싸움, 노예제도, 범죄, 전쟁, 사기 등의 죄악을 낳는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 인간이 사유재산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하는 걸 어쩌겠습니까?

 

루소의 그런 이상적인 생각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는 영국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였지요. 그는 [도덕감정론](1759)에서 이런 ‘욕망 예찬론’을 내놓았습니다. “욕망의 증식은 지구 전체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의 거친 수풀을 쾌적하고 기름진 평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넘나들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다를 생존에 유익한 재원으로 만들었다.”

 

이어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우리의 저녁 식단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푸주간 주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다.”며, 부(富)에 대한 각 개인의 욕망은 번영하는 국가를 낳게 된다고 주장했지요. 물론 오늘날의 세상은 루소보다는 스미스의 욕망론을 받아 들인 결과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렇지만 욕망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었지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욕망이 절제할 수 있을 만큼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욕망의 충족과 절제는 ‘행복론’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지요.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나는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보다는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법을 터득해왔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욕망의 통제를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사회적 차원에선 욕망의 집단적 분출이 번영으로 가는 길이었지요.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도 “모든 인간 행동은 욕망에 의해 유발된다.”고 했듯이,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곧 ‘욕망 분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성공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모든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욕망을 가지라고 부추겼지요.

 

“모든 성취의 출발점은 욕망이다.” 미국의 자기계발 전문가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 1883~1970)의 말입니다. 그의 저서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Think and Grow Rich)(1937)는 3천만권 이상이 팔렸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 힐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적어도 하루에 한번씩 눈을 감고 20여분에 걸쳐 돈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 책을 포함해 거의 모든 자기계발서들은 욕망을 통제하지 말고 성취의 동력으로 삼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렇게 해서 재미를 본 사람들은 그 방식이 좋았다며 열심히 신앙 간증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 망한 사람들은 말이 없지요.

 

“욕망은 인공적인 모방이다”

 

유대인으로 독일계 미국 사상가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런 욕망 예찬 풍토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건전한 사회(1955)에서 “대부분의 욕망은 인공적인 것이다”며 욕망에 대해 맹공을 퍼붓습니다. 그는 “나는 항상 쾌락에 열중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나 자신으로 의식하고 반성할 필요가 없다. 나는 말하자면 ‘욕망과 충족의 기관일 뿐이다.’ 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해야 하고 또 이 욕망들은 경제적 장치에 의해 항상 자극받고 지배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지요.

 

“성욕까지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성욕도 어느 정도 까지는 인위적으로 자극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현대의 체제가 필요로 하는 그런 인간 즉 항상 행복하다고 느끼고 회의하지 않고 갈등이 없고 폭력을 쓰지 않고도 조종되는 인간을 원한다면 성욕 같은 것도 인위적으로 자극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쾌락은 주로 소비와 획득의 충족에 있다. 상품, 경이, 음식, 음료, 담배, 대중강의 책, 영화 등 모든 것이 소비되고 삼켜져 버린다. 세계는 우리의 입맛에 대한 커다란 목적물 즉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젖가슴이다. 우리는 영원히 희망하고 영원히 실망하면서 사는 젖먹이에 불과하다.”

프롬의 끝장보고 싶어하는 과격한 어법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정체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이 단지 욕망과 충족의 기관일 뿐이라면, 그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요? 하지만 끔찍하긴 해도 우리 인간과 사회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미국 작가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의 말입니다. 과도한 욕망이 사라지기 어려운 이유를 명쾌하게 잘 설명한 말이지요.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한다는 느낌을 억눌러주기 때문에 크면 클수록 좋은 게 됩니다.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외적인, 특히 물질적인 성취에 두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은 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사회생활을 하는 한 욕망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본래의 욕구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이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보고서 그것을 욕망하게 된다.”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의 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잘 알고 있거나 욕망의 무의식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입니다. “기본적인 욕구들이 일단 충족되기만 하면, 아니 때로는 그 이전에도, 인간은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존재, 정확히 말해 자신에게는 결핍되어 있는데 타인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욕망은 모방’이라는 것입니다. 욕망의 원천이 질투나 시기심이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는 어린이들의 장난감 쟁탈전을 보면 실감이 나는 주장입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포장술이 발달한 어린이일 뿐 다를 건 없습니다. 아파트, 자동차, 가전제품, 자녀의 학교 등 모든 걸 남과 비교하면서 불타는 욕망을 품게 되는 것이지, 그 욕망이 본원적인 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욕망이 본원적인 것이건 모방에 불과한 것이건, 그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굴러가게 만든 동력은 ‘욕구’‘욕망’‘욕심’ 따위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느덧 공기처럼 돼 버린 광고는 이미 타오르고 있는 ‘욕구’‘욕망’‘욕심’의 불길에 계속 부채질을 해댑니다. 오래 전에 나온 이런 광고처럼 말이지요. “‘욕심 낸 그 곳에 꿈에그린이 온다(한화건설)’, ‘욕심 내세요(대방건설)’, ‘욕심 내세요, 어울림이니까(금호건설)’, ‘서울이 욕심 내는 곳(대림산업)’, ‘욕심나는 투자처(이수건설)’, ‘욕심 낼수록(한화)’, ‘욕심 낼 만한 이유(현대리모델링)’, ‘욕심만큼(대우건설)’, ‘아름다운 삶의 욕심(고려개발)’”

 

욕심 없이 미친 듯 일할 리 없습니다. 그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만족은 욕망의 불행이며, 욕망은 만족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욕망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의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욕구’‘욕망’‘욕심’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입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고 무한성장을 위해 무한질주하는 삶은 위태롭습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구만 그런 게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증명과 과시를 위한 ‘인정 욕구’도 아무리 선한 목적을 추구할 망정 그것이 과도할 경우 불행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일을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함정에 빠져 다른 것들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그 일을 밀어 붙인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지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일망정,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욕망의 절제와 통제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자 최재천은 인간이 욕망을 절제하도록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초적인 욕망을 자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제력의 차이 역시 엄연히 존재하고요. 그 차이가 상당 부분 인격의 차이를 만드는 거죠.”

 

모든 사람이 욕망을 절제하거나 통제할 필요는 없겠지요. 욕망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국 작가 리처드 칼슨(Richard Carlson, 1961-2006)의 말을 경청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스트레스 상담가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에 근거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세요.”라고 조언합니다.

 

“내가 확인한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파괴적인 마음의 버릇은,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자꾸만 욕망의 리스트를 키워 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언제나 불만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이 욕망이 채워지면 행복할 거야.’라는 사고방식은 그 욕망이 만족됨과 동시에 다른 욕망을 키우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내가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고 외칩니다. 자신의 욕망 수준을 낮추라는 것이지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는 욕망을 스스로 억눌러야만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욕망을 타이르며 제발 잠 좀 자라고 다독이는 사람은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난 인간일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혹 어떤 욕망이냐가 중요한 건 아닐까요?

 

비교에 의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자극하고 부추기는 광고를 볼 때엔 혀를 끌끌 차게 되지만,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괜히 그러겠습니까? 아무 불평 불만 없이 잘 살다가도 잘 나가는 친구의 전화 한통 받고 자신을 돌아보며 우울해지곤 하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서로 근황을 주고받다보면, 반드시 비교할 만한 무엇이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비교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 비교의 대상이 오직 물질 위주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돈 없이도 할 수 없는 일을 남과 비교하면서 자극을 받을 수는 없는 걸까요? 욕망의 정의를 다시 내려 탈물질주의적 욕망을 갖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사람과 언론> 제9호(2020. 여름)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