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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언론 소개

<사람과 언론> 제11호(2020년 겨울호) '책 속으로'

[시사· 인문·학술계간지 <사람과 언론> 제11호(2020 겨울호)]

 

맑은 공기 속에서 노후를 보내고자 했던 귀농 부부가 모두 암에 걸리고 같은 날 부부가 동시에 암으로 사망하기도 한 사건은 모두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끔찍하고 무서운 농촌 마을의 비극은 17년 만에 환경부 역학조사에서 밝혀졌다. 마을 뒷산에 들어선 비료공장이 그 원인이었다.

 

2001년 마을에 들어선 비료공장은 17년간 불법적으로 ‘연초박(담뱃잎 찌꺼기)’을 태워 비료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나온 1급 발암물질은 그대로 주민들이 호흡하는 공기 속으로 퍼졌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17년간 하루 종일 간접흡연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주민들은 몰랐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코로나19로 전 인류가 불안과 고통에 떨며 언택트(Untact) 삶을 살아가는 지금도 장점마을 주민들은 암과의 투쟁을 벌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말이 익산시일 뿐, 외진 농촌마을과 다름없다. 이 마을에서 20여 년 동안 발생한 희대의 사건에 대해 익산시와 전북도는 물론 직접적인 피해 물질을 제공한 KT&G 등은 나 몰라라 외면하며 팔짱만 낀 채 바라보는 형국이다.

-‘권두언’ 중에서

 

우리는 지역의 이익과 지역민의 이익이 같을 걸로 생각하지만, 그게 꼭 그렇진 않다는 데에 지방의 비극이 있다. 예컨대, 지방대학이 죽는 건 지역의 손실이지만,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건 지역민의 이익이다.

 

각 가정이 누리는 이익의 합산이 지역의 이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실이 되는 ‘구성의 오류’가 여기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추종하면서 서울로 ‘용’을 올려 보내는 일에 미쳐 돌아가야만 하는가?

-강준만 교수의 특강 ’한류를 통해 본 한국과 한국인’ 중에서

 

코로나로 더욱 우울하고 쓸쓸한 이 가을, 인간 본연의 외로움에 의도적으로 감염되는 날들이길 바랍니다. 존재의 외로움을 타는 것은 자아를 더욱 순수하고 맑은 상태로 정화하도록 이끄니까요. 찬란하게 빛나며 스러지는 단풍의 낙하를 보며 세속의 누추한 삶을 말끔하게 정리하시길 바랍니다. 대낮 창공에서 부재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현달을 바라보며 치열한 존재론적 명상에 잠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서늘한 바람 타며 더욱 맑고, 높고, 외로운 존재로 하염없이 나부끼시길.

-양병호 시인의 ‘시평’ 중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안은 되게 낮은 수준의 요구안이다. 노동자가 자기 임금을 다 지키려는 것도 아니고, 고용을 전부 유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회사를 점거해서 농성을 한 것도 아니다. 체불임금 일부 반납해줄 수 있다. 대신 고용만 유지해달라. 그게 비용이 문제라면, 두 달 쉬고 한 달 일하는 방식으로 순환 무급휴직을 하겠다. 대신 고용유지지원금 정부 제도 안에만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 이게 우리의 요구다.

-‘박이삼 이스타항공조종사노조위원장 인터뷰’ 중에서

 

대통령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론마저 침묵하면 언론의 직무유기가 된다. 박대통령의 불행은 전적으로 대통령과 친박측근들의 잘못이지만 검증, 견제, 감시역할을 제대로 하지못한 언론도 일부 책임을 공유해야 발전이 있다.

-김창룡 교수의 미디어 리터러시 ’정권별 언론통제 전략’ 중에서

 

나는 유권자들이 무소속 신인들에게 기회의 문을 좀 열어주는 게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오랜 세월 ‘2지선다형’ 선택에 중독돼 온 유권자들은 그럴 뜻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두 개의 답 가운데 하나에 대해선 강한 반감을 갖고 있기에, 이는 사실상 ‘2지선다형’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4지선다’나 ‘5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제발 공정한 ‘4지선다’ 마인드라도 가져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지역의 입장에선 배부른 소리다.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4지선다’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강준교수의 ‘명언 에세이’ 중에서

 

조선 시대 천주교도에 대한 수많은 사형이 전주에서도 집행되었지만, 대표적인 공개 장소는 남문 밖과 장대가 있는 서교장, 즉 숲정이이었다. 이들 장소는 국사범國事犯이나 효수를 통해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집행된 상징적인 처형 장소였다. 따라서 초록바위는 일벌백계一罰百戒를 해야 할 중죄인보다는 일반 사형수의 집행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초록바위에서 총살형으로 처형한 전주 접주 서영두가 동학의 수괴首魁보다는 전주 사람들이 ‘의인’으로 여기는 인물이었고, 초록바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천주교인은 갓 15세를 넘긴 어린 나이였던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논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의 처형 경위와 순국 터’ 중에서

 

왜 그럴까? 예전만 못한 현재 모습을 감추고 싶은 거다. 하지만 과거에 집착할수록 오늘이 초췌하고 궁상스러워진다. 흘러가버린 지난날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꾀죄죄해질 게 뭐란 말인가. 그러는 나 자신도 후배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아뿔싸! 어느 새 그런 나이가 돼버렸는가. 그렇다고 ‘이 나이에 뭘?’ ‘이젠 안 돼∼’라고 주저앉지는 말자. 지금부터는 옛날 일일랑 쿨하게 잊자. ‘예전엔 안 그랬는데’를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자. 오늘은 오늘일 뿐이다.

-이강록 칼럼 ‘나이 듦에 대하여-늙다리와 어르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