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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전설에 울고 웃는 ‘울릉도·독도 여행’

 

▲울릉도 도착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갈매기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유치환 선생의 울릉도란 시는 묘한 마력이 숨겨 있는 듯하다. 그리움과 외로움이 가득 배어 있으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혈육의 정과 같은 끈끈한 느낌을 받는다.

선생의 세 번째 시집 울릉도의 표제가 된 이 시는 귀중한 국토의 일부로서 울릉도가 지니고 있는 애국적 상념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은연중 시인 자신이 이 나라 국민의 한 개체이자 울릉도가 국토의 한 부분이라는 개체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다.

 

우릉도(芋陵島), 우릉성(羽陵城), 울릉도(蔚陵島), 울릉도(鬱陵島), 우릉도(于陵島), 무릉도(武陵島) 등 이름만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울릉도에 관한 시와 노래 또한 많기도 하지만 유치환 선생의 울릉도 시는 그 중 대표 중의 대표다.

 

솔직히 울릉도를 가고자하는 욕망이 꿈틀거리면서부터 내내 읽힌 시다.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 울릉도에 가고 말리다. 머지않아 하늘 길이 열린다고 하니 간 김에 독도에도 꼭 상륙해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오리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오래전부터지만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라며 노골적으로 자국 역사교과서에 명시했다는 보도가 도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결단했다. 서두른 만큼 결실을 보기 마련. 맞벌이 가정이라 가족 일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강릉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도착하기까지 불과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몹시 들뜨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섬 전체가 하나의 화산체...가는 곳마다 절경, 3무(無) 5다(多)로 유명

 

남면도동 항구

 

울릉도는 강릉에서 동쪽으로 178, 포항에서 217, 동해 묵호에서 161지점에 있으며, 독도와는 92떨어져 있다. 동경 131°52, 북위 37°30에 위치하며, 면적 72.9, 인구는 1만 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여행 가이드 전단지에 소개됐다. 1225리 체제의 울릉도는 지도로만 보아왔던 조그만 점이 아닌 큰 섬이란 사실은 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다.

 

섬 전체가 하나의 화산체로 해안은 대부분이 절벽을 이루고 있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풍 일수가 많다고 한다. 강수량은 연중 고르게 나타나며, 특히 겨울철에는 강설량이 많아 우데기라는 특수한 가옥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 식생은 향나무·박달나무인데, 특히 향나무는 섬 전체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밖에 해당화·섬들국화도 자라고 있다. 울릉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울릉도를 3() 5() 지역으로 표현하고 있다. 3무는 도둑, 공해, 뱀이 없다는 뜻이란다. 도둑과 공해가 없다는 건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뱀이 없는 이유는 특이하다. 산에 향이 짙은 향나무가 서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 정상에서 바라본 울릉도 항구

 

뱀이 향나무 향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다섯 가지 울릉도에 특별히 많은 것이란 물, 바람, , 향나무, 미인이라고 한다. 일행들 중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왜 그럴까?

 

울릉도에 대한 지명은 512(지증왕 13)에 우산국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 등장한다. 930(태조 13) 우릉도(芋陵島), 덕종 때 우릉성(羽陵城), 인종 때 울릉도(蔚陵島) 등의 지명이 등장했다. 고려 때는 울릉도(鬱陵島우릉도(于陵島무릉도(武陵島) 등이 나온다.

 

7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울릉도는 말 그대로 절해고도였다고 한다. 섬 주민들은 육지와 단절되다시피 한 삶을 살았고 화산섬이 빚어낸 자연과 고유의 기후와 식생 속에서 독특한 생활양식도 만들어졌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지금은 왕래 배편도 늘어나고 관광객도 많이 찾아 고립감을 덜 느끼지만, 계절적으로 11월부터 4월 사이에는 파도가 높아 배편의 결항이 잦아 이 시기에 울릉 주민 중 일부는 포항 등지에 나와 생활하기도 한다.

 

 

시린 에머랄드 바다색과 잘 어울리는 섬 울릉도, 곳곳이 전설로 가득

 

에머랄드빛 바닷물

 

1만여 명이 사는 울릉도는 기이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도동항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외국에서 오래 살고 많이 다닌 가수 이장희가 울릉도의 자연에 반해 눌러앉아 살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장희의 홍보 덕분인지 몰라도 울릉도에 관광객이 크게 늘었고 청정 지역이라는 점도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울릉도를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자립섬'으로 조성하는 사업이 시행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울릉도 유일의 평지인 나리분지에 들어서면 가장 높은 성인봉을 마주하며 주민들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울릉도 특유의 토산물인 명이나물 전과 여러 가지 약초 껍데기와 함께 빚은 씨껍데기(동동주) , 산채정식이 별미다. 울릉도는 가는 곳마다 재미난 전설이 서려 있다. 대표적인 곳 몇 군데를 들은 대로 소개한다.

 

어딜 가나 절경과 전설이 어우러져 있는 울릉도

 

효녀의 화석 촛대바위

 

촛대바위에 관한 전설은 저동마일에서 유래됐다. 아버지를 바다에 잃고 딸은 먹는 것도 잊고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는 전설을 간직한 촛대바위. 지치고 지쳐서 우뚝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이 되어 버렸다는 촛대바위는 `효녀바위' 라고도 부른다. 바위가 곧 이 노인의 딸인 효녀의 화석이라고 한다. 이 촛대바위는 현재 저동 어업전진기지 방파제의 한 부분으로 우뚝 솟아 있다.

 

성인봉에는 장군의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한쪽 발자국뿐이다. 그것은 왼쪽 발자국이며 한 발자국인 오른쪽 발자국은 육지의 어느 곳에 있다고 하니 그 장군의 한 발자국의 크기는 상상하기에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루는 육지에서 사자(使者)가 왔다고 한다. 성인봉에서는 큰 장군이 날듯하며 그 장군이 나게 되면 육지가 위협받을 것이니, 미리 그 장군이 태어날 만한 땅의 지혈을 끊는다는 것이다. 사자들은 성인봉에 올라갔다. 지리풍수설을 잘 아는 사람이 "여기다" 하고 가리키자, 사신들은 거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길쯤 파니까 무엇이 불끈 솟았다.

 

핏줄기였다. 장군이 태어날 혈맥을 끊은 것이다. 피는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까지 흘러 내렸다이때부터 울릉도에는 큰 장군이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 혈맥을 끊은 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핀 동백꽃 사연

 

어느 마을에 금슬(琴瑟)이 좋은 한 쌍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육지에 갈 일이 생겨서 육지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 날짜가 지나가서 남편이 돌아온다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겠다는 날이 지나가고 하루 이틀 날이 거듭되어도 배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의 기다림이 쌓여 여러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남편은 돌아올 줄 몰랐다.

 

아내의 간절한 기다림은 어느 듯 가슴에 병이 되어 응어리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내는 기다림에 지쳤는지 눕고 말았다. 이웃 사람들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죽거든 남편이 돌아오는 배가 보이는 곳에 묻어 주세요." 하고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도 너무 정장(情狀)이 가여워 죽은 여인의 넋이라도 위로해 주려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니 그 집 앞뜰에 있는 후박나무에 수없이 많은 흑비둘기 떼가 와서 우는데 " 아이 답답 열흘만 더 기다리지 넉넉잡아 온다.온다. 남편이 온다. 죽은 사람 불쌍해라. 원수야, 원수야, 열흘만 더 일찍 오지 넉넉잡아서."하는 것처럼 울어대어서 마을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육지에서 남편이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남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내가 묻힌 묘지로 달려가 목 놓아 울었다.

 

" 왜 죽었나. 일 년도 못 참더냐. 열흘만 참았으면 백년회로 하는 것을. 원수로다. 저 한바다 원수로다. 몸이야 갈지라도 넋이야 두고 가소. 불쌍하고 가련하지." 하고 아내의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 남편은 아내 생각에 매일 같이 아내의 무덤에 와서 한 번씩 서럽게 울고 돌아가곤 했는데 하루는 돌아서려니 아내 무덤 위에 보지 못하던 조그마한 나무가 나있고 그 나무 가지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은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피어 있었다. 바로 이 꽃이 지금 울릉도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동백꽃이라고 한다.

 

 

삼도봉

  

죽을 쑤었는데 그 맛이 그야말로 엿과 같아 호박엿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의 일이다. 처음에는 모두 열대여섯 가구가 여기저기 산재해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른 봄이 되어 육지에서 가져온 호박씨를 울타리 밑에 심었다. 이 호박은 나날이 자라나서 호박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박이 익기도 전에 그 처녀는 혼처가 생겨 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처녀가 시집을 가고 나서 호박넝쿨에는 큼직큼직한 호박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호박은 이 집에서 따 먹어도 따 먹어도 자꾸만 열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다가 방안 가득히 채웠다. 겨울이 닥쳐와 눈이 내리고 일없는 날들을 보내게 된 어느 하루는 그 호박으로 죽을 쑤었는데 그 맛이 그야말로 엿과 같이 달았다. 그것은 호박 맛이 아니고 엿 맛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호박을 많이 재배하게 되었고 겨울에는 그 엿 맛과도 같은 호박죽을 쑤어 먹게 되었다. 이로써 호박엿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호박을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물을 먹고 생명을 이었다’해서 ‘명이’

 

울릉도에서 아주 이른 봄에 눈 속에서 자라는 나물. 바로 명이라고 부르는 맛 좋은 산채(山菜). 옛날 개척 당시에는 식량이 모자라 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는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산에 올라 눈을 헤치고 이 명이를 캐어다 삶아먹고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물을 먹고 생명을 이었다고 해서 명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명이나물전과 씨껍데기술

 

사자바위와 투구봉의 얽힌 사연  

 

울릉도 서면 남양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자암과 투구봉은 서기 500년 전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부를 때, 우산국의 비화를 담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맞고부터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 사기에만 급급했다. 또 별님이란 딸을 얻고부터는 도가 심해져 갔다. 왕후의 사치를 위해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신라까지 노략질을 뻗쳤다. 한편 신라백성들은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를 보냈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우산국 군선에 패하고 말았다이사부는 군사를 재훈련하고 계략을 세워 이듬해 다시 토벌의 길에 올랐다. 이사부가 먼저 항복을 권했지만, 우해왕은 한번 이긴 터라 이를 업신여기고 사자(使者)마져 죽여 싸움을 부추겼다. 이에 신라군은 짜여 진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선의 뱃머리에 목사자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 하고 또 화살을 쏘게 하며 군선을 몰게 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신라군사들이 큰소리로 창과 칼을 즉시 거두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섬사람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우해왕을 축출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우해왕이 투구를 벗고 이사부에게 항복했다. 결국 목각사자 때문에 싸움에 지고 만 우산국왕은 "내가 죽더라도 그 불사자로 하여금 영원히 우산국을 지키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 이사부는 우해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목각사자를 물에 띄웠고,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각사자와 우해왕이 던진 투구가 돌로 변해서 사자암과 투구봉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기암절경에 맑은 바닷물까지

 

용굴로 왔다가 하늘나라로...북면 용녀 전설

 

용굴

 

석포 마을에 조그마한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그곳에는 자식도 없이 쓸쓸히 살아가는 늙은 할머니가 한분 계셨다. 농사는 없고 바닷가에 나가 미역이나 김을 뜯어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살아가는 이 생활에 무슨 낙이 있으랴, 그저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이 적적하고 무료한 삶에 낙이나 있을 걸 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었다. 이런 간절한 바람과 소망이 어느덧 입버릇처럼 되어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저절로 "용왕님네, 용왕님네 딸이라도 하나 점지해 주소서" 하는 말이 노래가 되어 무심히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몹시 후려치고 집채를 날려버릴 듯이 거세던 밤이었다. 할머니의 귀에 어디선가 가냘픈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분명 아이가 우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 비바람 치는 밤에 아이 울음소리는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혹시 이 마을의 아이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헤메며 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울음소리는 좀 더 크게 들려왔다. 할머니는 무서움을 무릅쓰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손으로 더듬으며 찾아 가니 어느 후박나무 아래에서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대여섯 살이나 되어 보임직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 아이를 얼른 감싸 안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기고 자기 옷을 입혀 아랫목 따뜻한 이불속에 뉘어 놓고 얼른 부엌으로 나가 낮에 따다 두었던 전복으로 죽을 쑤어서 그 아이에게 먹였다. 죽을 받아먹은 아이는 추위도 풀리고 곤했던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할머니가 자는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니 티끌 하나 없이 곱고 맑은 얼굴에 어떤 고귀함마저도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날이 밝자 어린아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아이더러 차근차근 캐어물었다. 집이 어디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구이며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또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거기에 왔었느냐 등 여러 가지로 꼬치꼬치 캐어물었으나 그 아이의 대답은 시종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 뿐이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몇날 며칠이 지나도 아이를 잃었다거나 아이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럭저럭 해가 바뀌고 이제는 아이도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고 또 이름도 용녀라고 불렀다. 할머니 생각에는 날이면 날마다 용왕님께 빌었으니 이는 필시 용왕이 나를 불쌍히 여겨 이 아이를 보내주심이 틀림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제 살아가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바닷가로 가나 산에 나무를 하러가나 항상 용녀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럭저럭 달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용녀도 커가면서 점점 그 아리따움을 더해갔고 또 이제는 살림살이도 유복해져 같다. 용녀는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으며 모든 일에 솜씨도 뛰어났다. 그래서 이소문은 온 섬 안에 퍼져나가 아들을 둔 부모들로부터 빗발치는 청혼이 들어왔다.

 

그러나 용녀의 얼굴에는 청혼이 들어올 때마다 수심기가 어리어 갔다. 하루는 좋은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으므로 용녀의 의사를 물어보니 용녀는 아무 말도 없다가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던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다.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 며칠을 두고 근심을 하고 기다렸으나 종래 소식이 없었는데, 어느 날 밤 용녀가 할머니 앞에 홀연히 나타나 "어머니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저는 원래 하늘나라 사람이온데 잠시 인간세상의 물정을 살피고자 내려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같이 인자하신 분을 만나게 되어 잘 지내고 갑니다. 저는 올 때는 용굴로 왔는데 갈 때는 천부로 가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입니다. 부디 몸성히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허전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친자식과 진배없이 키워왔는데... 꿈을 꾼 그날 저녁 천부에서는 오색이 찬란한 구름이 하늘에 떴다고 한다. 그 뒤 이곳 석포 마을에 정을 두고 갔다고 해서 정들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외에도 울릉도는 어딜 가나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재미난 전설이 즐비하다. 울릉도에서 수많은 전설들과 하룻밤을 같이 하고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독도상륙 준비에 나섰다. 많은 여행자들은 독도에 오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날씨가 짓궂어 쉽게 배가 항구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우리 일행을 배를 날씨는 용케도 상륙을 허용했다. ! 독도다.

 

설레는 마음으로 상륙...아 독도다!

 

독도 이사부길

 

대한민국 영토 최동단에 있는 섬.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며,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경 131°51'~131°53', 북위 37°14'00"~37°14'45"에 위치한다. 동도와 서도, 주변의 89개의 부속섬으로 구성된다. 해안선의 길이는 동도 2.8km, 서도 2.6km, 면적은 동도 73,297, 서도 88,740, 인구 50여명.

 

독섬, 돌섬, 삼봉도(三峰島),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 이름도 가지가지다.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독도는 대한민국 정부 소유(관리청: 국토교통부)의 국유지로서 천연기념물 336(198211월 문화재청)로 지정되어 있다.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분번 포함 101필지)이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면적은 187,554(동도 73,297, 서도 88,740)이다. 독도의 좌표는 동도 삼각점 기준으로 북위 371422, 동경 1315208초이며, 울릉도의 동남향 87.4에 위치한다. 울릉도에서는 맑은 날 독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가까워서 삼국시대부터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되고 이용되어 왔다.

 

지명과 풍습, 전설 어딜 봐도 독도는 분명 우리 땅

 

독도에 상륙하는 사람들마다 태극기를 들고 즐거워하는 모습

 

고문헌 속에서 확인되는 독도의 명칭은 우산도(512), 삼봉도(1471), 가지도(1794), 석도(1900), 독도(1906) 등이 있다. 우산도(于山島)는 가장 오래 동안 독도를 부르던 명칭이다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등의 옛 문헌에서 독도를 우산으로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간혹 ()’의 표기를 잘못 읽어서 ()’, ‘()’, ‘()’ 등으로 표기된 사례도 있지만 ()’가 정확한 표기이다.

 

조선 성종 때에는 삼봉도(三峰島)라 불렸다. 섬이 세 개의 봉우리로 보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종실록(1476) 15에 기록되어 있다.정조실록(1794)에는 가지도(可支島)에 가보니 가지어가 놀라 뛰어 나왔다라는 기록에서 독도의 또 다른 이름인 가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를 우리말 가제로 음역한 것으로,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한다.

 

90여 개의 돌섬과 암초로 구성된 섬, 독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는 울릉도의 관할구역의 하나로 석도(石島)’가 등장한다. 여기서 석도란 독도를 말하는 것으로, ‘()’의 한글 표현이 이고, 돌의 남해안 사투리인 이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행정지명으로서 독도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는 돌섬독섬으로 발음되면서 독도(獨島)’로 표기가 되었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섬돌섬을 혼용하고 있다

 

90여 개 바위들에 관한 재미난 사연들

 

죽도와 갈매기

 

독도는 해저의 순상화산체로서 해수면 위로 노출된 화산섬이다. 동도와 서도의 주요 섬을 비롯해 90여 개의 돌섬과 암초로 구성되어 있다. 독도의 각 지명들은 독도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위 이름들도 아름답지만 얽힌 사연들이 재미있다. 섬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명칭과 이야기들이다.

 

큰가제바위 : 강치가 출현하는 장소로 현지 어민들이 구전으로 불리어 온 바위

작은가제바위 : 큰 가제 바위 우측에 위치한 작은 바위로 현지 어민들이 구전으로 불리어 온 바위

지네바위 : 바위이진해라는 어민이 미역을 채취하던 바위

넙덕바위 : 현지 어민의 구전으로 전하는 바위

군함바위 : 군함과 같은 독특한 모양의 바위

김바위 : 독특한 모양에 대한 명칭으로, 김은 해태를 의미하며 구전되어 온 명칭

보찰바위 ; 보찰(거북손) 모양의 바위

삼형제굴바위 : 형상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3개의 동굴이 있어 현지 어민들의 구전에 의한 명칭

닭바위 :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의 바위

춧발바위 : 춧발은 갑, 곶 등이 튀어 나온 곳을 의미하는 현지 방언으로 구전되어 온 명칭

촛대바위 : 촛대 모양의 바위로 권총바위라고도 함

미역바위 : 의용수비대원들이 미역 채취를 많이 하여 붙여진 명칭

물오리바위 : 물오리가 서식하는 바위

숫돌바위 : 주민들이 생활할 당시 칼을 갈았다는 바위

부채바위 : 부채를 펼친 모양의 바위

얼굴바위 : 사람의 얼굴과 흡사한 모양의 바위

독립문바위 독립문 형상의 바위

한반도바위 ; 북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반도 형상과 꼭 닮아 붙여진 명칭

코끼리 바위 :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형상의 바위

해녀바위 : 예전 해녀들이 쉬었던 바위

전차바위 : 전차 모양의 바위

 

/위 글은 <사람과 언론> 제5호(2019년 여름)에 게재된 '포토 에세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