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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영화 속으로

모두가주인공이다 <1987>

모두가 주인공이다

<1987>

김명주(영화평론가)



혼자 영화보기 경력(?)도 어느덧 13년이 넘었다. 최근엔 혼밥, 혼술, 혼행 등 무언가를 혼자하기가 점점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주변에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나를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혼자 영화 보러가는 건 아직 좀…….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 같이 영화를 보러 가게 되면 보통 상대의 취향에 맞추는 편이라서요. 물론 같이 영화를 보면,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좋죠. 하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는 내가 편한 시간에 맞춰서 그 영화만 딱 보고 오면 되니까 좋더라고요. 영화 전후에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다른 걸 하면서 거의 반나절을 훅 보내지 않아도 되고요.”


영화를 혼자 보러가는 데는 각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처음 영화를 혼자 보러 가는 날은 조금은 어색하고 긴장되기도 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혼자 영화보기 경력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특별했던 첫 날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표를 혼자 끊고 상영관 좌석에 앉아서 광고를 보고 있는데, 직원 분이 앞문을 굳게 닫았다.


어라, 나 다음에 아무도 안 들어왔는데. 혹시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던가?’


뒤로 고개를 돌려보니 영사기 불빛만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랬다. 그 큰 영화관에 나만 혼자 그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그 넓은 공간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암흑으로 뒤덮였을 때 느꼈던 그 적막감과 공포란. 3초 정도 까만 우주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느낌과 비슷할까?


어쨌든 다행히도 영화가 시작하니 온전히 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처음은 언제나 중요한 모양이다.

 

보통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보고 가는 편이다. 장르, 감독, 출연진, 줄거리, 예고편 정도. 누군가는 미리 그렇게 다 알고 가면 영화가 재미없지 않냐고도 하는데, 어쩌다보니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번 <1987>은 전혀 정보 없이 관람하게 되었다. 이실직고하자면, 혼자라면 절대 안 봤을 영화였다. 얼떨결에 지인과 함께 보게 된 영화라 ! !’ 내용을 다룬 것이라고만 알고 갔다. 결론은 함께 보자고 한 지인에게 감사하고, 조사하지 않고 간 스스로에게 감사하다.

 

<1987>은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다. 정말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단한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저마다의 연기력을 마음껏, 최대한으로 뽐내주었다. 다시 이런 조합을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주연 급이 아닌 배우들까지 모두 혼신의 연기를 보여줘서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아니, 영화에는 주연과 조연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영화 속 삶의,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추운 겨울 강물에 들어가 죽은 아들의 재를 뿌리며 왜 못 가니 하던 아버지, 부검에 참여해 조카의 시신을 보고 참으려 애써도 오열을 터뜨리던 삼촌, 가족을 협박하며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는 상사에게 핏발 선 눈으로 명 받들겠다 말하던 형사, 이 세 장면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슬프고 아프지만, 동시에 자랑스러운 역사. 그때의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몇 백, 몇 천 년 전의 일이 아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일어난 일, 바로 오늘의 역사다. 문득 한국사 첫머리에서 배우던 E. H. Carr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1987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창 아장아장 걸으며 낯선 세상을 눈과 가슴에 담아가고 있었을까. 한쪽에서는 삶이,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이 존재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를 배울 때는 신기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렇게 오래 지난 일이 아닌데, 내가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인데, 교과서를 통해 글로 접하고 흑백사진을 보다 보면 마치 나와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부연 막 너머를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역사, 정치라는 것에 재능도 관심도 없기 때문에 다소 무감각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에 나오는 연희보다도 훨씬 정치와 사회라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이니까.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냥 나 자신과 내 가족이 무탈한 것으로, 그저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뭔가 해야 하나. ?

 

인물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따라가는 구성이나 전개방식은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산만하고 이도저도 아니게 될 수 있는데, <1987>은 무게 중심을 잘 잡으며 진중하지만 깔끔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인물 하나하나의 선택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특별한 영웅이 특별한 능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가, 누군가의 자녀가, 누군가의 이웃이,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작은 선택과 노력들이 모여서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인지 알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요? 군인들이랑 싸울 거예요?”


울먹이며 소리치던 연희, 수많은 일들을 겪은 후 종내는 신문에서 를 발견하고 골목길을 내달린다. 거리로, 광장으로 뛰어든다. 마침내 버스 위로 올라선다. 그 때 연희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내가, 네가, ‘우리가 되었을 때에만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다.

 

어쩌면 아직도 난 변함없이 무심한 방관자일지도 모르겠다. 별로 혼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자책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의미를 알았다면, ‘우리의 작은 선택과 시도와 노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를 진심으로 느꼈다면, 나도 <1987>연희처럼 조금씩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2018년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당신이, 우리가 지금 이순간도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우리 모두가 삶의, 역사의 주인공이다.

/<사람과 언론> 창간호(2018년 여름)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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