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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영화 속으로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다르지만, 있는 그대로, 함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김명주(영화평론가)




 

기예르모 델 토로감독은 여러 영화를 만들고 제작에 참여했지만, 내가 제대로 이름을 각인한 것은 퍼시픽 림에서였다. 개인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영상이 정신없이 화려한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퍼시픽 림은 그야말로 내 취향저격인 영화였다. 다만 외모지상주의자(?)인 나의 원칙은 나쁜 놈일수록 예뻐야 한다.’이기에, 영화에서 으로 묘사되는 캐릭터가 왜 커다랗고 흉측한 파충류 과의 괴수여야만 하는가!’라는 점에서는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기 감독님께서 이번에는 괴수와의 로맨스를 떡 하니 던져주셨다. 로맨스는 비선호 장르지만, 감독님이 괴수를 소재로 작품을 얼마나 흥미롭게 그려냈을지 궁금함을 참지 못해 영화관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물로 가득 차 있는 방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둥둥 떠다니는 가구들은 물 특유의 빛과 부유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들과 함께 흐르던 엘라이자는 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뿐히 소파에 눕혀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그 오묘함과 신비함. 엘라이자는 꿈속에서 자신의 고향을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다리를 얻는 대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인 엘라이자. 목에 그어진 붉은 줄은 다른 이들에게는 흉터로, 상처로만 보인다. 하지만 상처는 고통으로만 그치지 않고, 때로는 내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다. 경험하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 중 하나이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의 모양은 곧 사랑의 모양이에요. 물과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강한 변화의 힘이죠.”


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담는 그릇에 따라, 지형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 있는 물질이다. 하지만 그런 탄력적인 변화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또한 물이다. 그와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의 모양이라고 감독은 이야기한다.

 

괴물, 괴생명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영화에서 리처드는 성서를 언급하며신은 우리를 닮았겠지. 당신보다는 내 쪽을 더 닮았을 가능성이 높고.”라고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낸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성서는 말하지만, 우리는 과연 신에 가까운 존재일까. 영화 속 생명체와 리처드 중 누가 더 괴물에 가까운 존재일까.


영화에서 붙잡힌 생명체는 괴물로 불리며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잡히기 전 아마존에서는 신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자일스의 상처도 낫게 해 주고, 얼마 없는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손가락을 자르고, 고양이를 산 채로 잡아먹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처음 보는 것에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소중한 것을 지킬 줄도 안다. 그저 이런 점도 저런 점도 가지고 있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존재다.

 

한편, 말을 할 수 없는 엘라이자를 만난 후 리처드는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다. 성관계를 하며 아내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아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던 리처드, 엘라이자에게 접근해 희롱하던 미투각인 리차드를 생각하니, 얼마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전하여 읽은 에리히 프롬<소유냐 존재냐>가 떠올랐다. 엘라이자가 리처드는 거부하고, 낯선 생명체에게는 사랑을 느꼈던 것은, 상대가 엘라이자를 그저 소유하려고 한 것과, 하나의 존재로써 인정하고 느끼며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엘라이자는 말한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 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니까요.”

 

영화 속에서는 곳곳에 물이 등장한다. 엘라이자가 목욕하던 욕실의 물과 수증기, 계란을 삶을 때 보글보글 끓던 냄비 속의 물, 생명체가 헤엄치며 갇혀 있던 캡슐과 수조 속의 물, 하늘에서 내리던 비, 엘라이자가 출퇴근하며 머리를 기대던 차창 밖의 빗방울, 생명체를 자유롭게 보내주려던 어둡고 비 오는 날의 항구, 둘이 함께 꼭 껴안았던 깊은 바다. 물은 생명이다. 엘라이자가 원래 살아갔어야 할 세상. 본연 그대로 존재함이 허락되는 장소.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언젠가 지인에게 우리는 왜 함께 하는 걸까요? 당신은 왜 나와 함께 하죠? 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상대가 한 말이 종종 생각난다.

 

너와 나는 참 다른 사람인데,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존할 수 있다는 게 난 좋더라.”

 

TV에서 헤어지는 커플들의 사유로 꼭 언급되는 것이 성격 차이. 그런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 사람들이 뜨겁게 사랑할 때는 그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저 콩깍지의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이겠지.’라며 씁쓸한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걸까?

 

다름보다 같음에 집중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다가 왠지 그것도 해답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점은 같은 대로, 다른 점은 다른 대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아닐까. 

 

 

 

헤어지기 전 비 내리던 밤, 생명체와 엘라이자가 식탁에 마주 앉아 가만히 상상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아련한 모습. 현실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전할 수 없었지만, 상상 속에서는 둘이 함께 아름답게 춤추며 부르던 그 노래가 지금도 내 귓가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You'll never know just how much I miss you
You'll never know just how much I care

/<사람과 언론> 창간호(2018년 여름)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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