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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영화 속으로

"What would you do for LOVE?"

[김명주의 영화속으로]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익숙함을 낯설게, 비었기에 가득한

 

가끔 익숙하게 사용하던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데자뷔와 반대인 이런 상황에 대한 과학적 논문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할 법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찾아보지는 않았다.(찾으신 분이 계시다면 연락 좀.^^;;)

이번 영화 제목을 보면서, 내가 알고 쓰던 천문이 이런 뜻이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한자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떨어진 의미는 아니니까.’ 하며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문학이나 예술, 과학 등의 분야에서 남들은 쉬이 지나치는 것들, 그러니까 소위 익숙한 것들에게서 낯섦을 끌어낼 때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곤 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영화 ‘천문’은 우리가 익히 아는 세종대왕과 장영실 두 천재(영화를 볼수록, 정말 천재로구나! 라는 생각이 팍팍 든다. 어떻게 저런 걸 뚝딱뚝딱 만들어 낼까?)가 만들어낸 조선과학의 뛰어난 업적보다는 역사책에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타 사극과는 차별성을 둔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는 세종실록의 한 줄에서 이런 이야기를 끌어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장영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다는 빈틈이 흥미로웠다.”라는 허진호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을 때, 어쩐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예전에 익산 미륵사지를 찾았을 때, 사람도 거의 없는 허허벌판을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거닐었던 적이 있다. ‘내가 걷는 이 땅을 천 년도 전에 옛 복식을 한 과거의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걸었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 텅 빈 공간이 한 순간에 북적대고 살아 있는 공간으로 내 머리 속에 가득 그려졌다. 말과 글도 그렇지만, 상상력이야말로 신이 내려 준 귀한 선물이라고 매번 감사하게 된다.

 

두 사람, 두 배우

세종대왕과 장영실. 우리는 그 두 사람에 대해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해 왔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언제 무엇을 만들었다 정도의 단순한 지식을 습득했을 뿐,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서울의 달, 넘버 3, 쉬리 이후 20년 만에 재회한 두 배우에게 이 영화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 때, 세종과 영실의 역을 놓고 서로 조율해가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최민식 씨가 세종 역을 맡는 게 더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는데, 나는 오히려 그랬다면 왕에게 너무 무게감이 쏠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바뀌었다면 바뀐 대로 물론 두 배우 모두 역할을 잘 소화해내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최민식 씨 같은 경우는, 영화 ‘명량’에서 보여준 그 한없이 고독하고 묵직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전쟁을 앞두고 자신에게 맡겨진 목숨들의 무게를 어깨에 가득 짊어진 채,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장군의 고뇌를 대사 없이도 클로즈업된 두 눈동자만으로 관객에게 전달했던 그 대단한 몰입. ‘천문’에서는 ‘아니, 어떻게 저 나이대 아저씨가 저렇게 귀여울 수 있는가!’라고 통탄하게 만들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눈빛과 몸짓으로 세종바라기인 영실을 잘 표현했다. 참으로 연기스펙트럼이 넓고 깊은 배우라는 것을 영화 관람하는 내내 느꼈다.

 

한석규 씨는 ‘뿌리 깊은 나무’에 이어 다시 한 번 세종대왕 ‘이도’ 역을 맡았다. 사실 그 드라마는 보지 않아서 영화 ‘천문’에서의 이도와 비교해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했다. 하지만 분명 한석규 씨가 표현해 낸 ‘이도’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섬세함과 카리스마를 오가는 감정표현. 뚜렷한 목표를 가진 워커홀릭 군주와 별감성 사내, 그리고 피 묻은 선왕의 곤룡포를 눈앞에 두고 자신에게도 같은 피가 흐름을 두려워하던 아들. 특히 그 좋은 목소리로 “야 이 개새끼야.”를 내뱉었을 때 느껴지던 전율은 말할 수 없는 비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한글창제가 없었다면, 야이개새끼야는 오호라 견자여,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은 개님에게 드리며.)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천문’은 세종과 영실,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다. 영화를 관람하기에 앞서 미리 본 한줄 평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 가지 문구가 있었다. 하나는 최민식, 한석규 두 배우의 연기력. 다른 하나는 브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브로맨스가 강해서 불편했다는 글도 읽었는데, 그렇다면……. 더욱 더 보러 가는 것으로 결정! 왜냐하면 나는 브로맨스에 환장하는 사람이므로, 그저 땡큐이기 때문입니다. 하. 하. 하.

 

이렇듯 미리 알고, 어느 정도(?)를 예상(이라 쓰고 기대라 읽는다.)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도 아닌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니요. 광대 승천합니다. 심지어 빈정상할 지경! 세상에 둘 밖에 없냐? 엉? 솔로천국 커플지옥! 흥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찐사랑이었다. 이것은 그냥 로맨스물인 걸로. 이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니. 막 달 밝은 밤에 같이 대자로 드러눕고 엉? 방 안에서 문풍지별자리 뚫으며 알콩달콩하기 있소 없소! 허진호 감독님께서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로 다진 멜로내공을 여기에 쏟아 부으신 게 아닌가 싶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스갯소리 섞어가며 글을 썼지만, ‘천문’은 참으로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당신의 꿈을 내 손으로 이루어주고 싶고, 당신의 재주를 아껴 계속 내 곁에 두고 싶고. 당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아깝지 않고,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간절한 꿈을 두고 거래할 수도 있고. 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숱하게 배웠던 각종 연군지정을 담은 시조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운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신을 인정해주는 군주를 만나 관노에서 종3품 대호군의 자리에 올랐으니, 士爲知己者死라는 말처럼 올곧은 사랑을 보낼 만도 하다 싶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그렇게 딸려오는 별책부록 같은 감정은 아니기에.

섭섭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왕을 찾은 영실에게 ‘이도’, ‘영실’이라 훈민정음으로 글자를 써 보였던 이도. 어색하고 전하답지 않은 글자라며 물러났으나, ‘이도’라는 활자를 만들어 몰래 간직했던 영실. 왕과 신하가 아닌, 서로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했던 그 마음들이 참 안타깝고 애틋했다.

 

이번 영화의 부제를 놓고, 유독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단 하나의 문구로 ‘천문’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러다가 문득 ‘나탈리 포트만’이 나왔던 디올 광고가 떠올랐다. “사랑해.” “증명해 봐.”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별들에게 물어볼까?

 

/김명주 /<사람과 언론> 제8호(2020년 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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