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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진단과 전망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동학농민혁명 시작에 관한 규명

동학농민혁명 재조명

고부봉기와 무장기포에 대한 정읍시와 고창군의 인식 차이

 

2019년 5월 31일, 정읍시의회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고부봉기가 빠졌고, 검인정한국사교과서마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고부봉기가 아닌 무장기포로 서술하고 있다.”면서 “잘못된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학생들은 단순 민란으로 평가 절하된 고부농민봉기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새 역사교과서에는 고부농민봉기가 최초 봉기이며 시작임을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면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개정 및 교과서 오류 수정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였다.[「정읍시사」 2019. 6. 28]

 

이에 맞서 고창군의회는 6월 18일에 “정읍시의회가 주장하는 고부농민봉기는 지역농민들의 봉기이며, 사발통문 역시 형식을 갖추지 못해 학계 해석이 분분한데, 새 역사교과서에 고부농민봉기로 명시하라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라고 반발하며, ‘정읍시의회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개정 및 교과서 오류 수정 촉구 건의문에 대한 반대 건의문’을 채택하였다. 고창군의회가 이처럼 반응한 데에는 "고창군민은 무장기포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할 것을 주장했지만 황토현전승일로 제정돼 상심하고 있는 때, 정읍시의회의 역사 왜곡은 6만 고창군민의 자존심을 짓밟은 행위이다."라는 점도 작용하였다.

 

유쾌하지 못한 이 장면은 사실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마저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법정기념일 제정을 추진하면서 다툼의 소지를 만들어낸 때문이었다. 즉 다수가 적합한 기념일로 인정하거나 추천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일에 관한 정리가 일체 없었던 것이다.

 

기존의 시작일로 알려진 고부봉기와 새롭게 부각된 무장기포에 대해서 공동연구는 고사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원하는 주장만 내세웠던 것이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정읍지역의 모습이었다. 황토현전승일이 적합하다고 주장하면서 고부봉기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외면하였고,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산대회를 주장하였다. 왜 정읍지역에서 고부봉기를 외면하였는지를 추적하는 것도 본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와 함께 백산대회에 관한 부정과 기념일 후보 제외, 역사적 사실 검증이 부족한 전주화약 등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건들에 대한 공동연구나 종합토론회조차 개최된 바 없으며, 연구자와 지역의 주장만이 난무하였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다수의 국민에게는 “만석보(萬石洑) 수세(水稅)로 상징되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에 맞서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세운 뒤, 고부관아를 점령한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하고 분리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3월 봉기라는 설이 꾸준히 이어져 왔었다. 이때의 3월 봉기는 백산대회였다. 그런데 1985년 이후부터 고부봉기는 ‘조선후기 숱하게 일어난 민란의 최고 단계’ 또는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나 전사(前史)’으로 정리되고, 무장기포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주장이 다수설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에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국가가 90년 만에 애국애족운동으로 인정한 동학농민혁명에서 고부봉기는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2015년부터 사용되는 검인정한국사교과서 다수가 무장기포를 본격적인 시작으로 서술하였다.

 

이처럼 무장기포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확정되는 것과 달리 한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연구 성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들 연구는 공통적으로 「사발통문거사계획」부터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 등 초기전개 과정이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발통문거사계획」과 고부봉기를 주도한 전봉준 등 지도부가 이후 무장기포와 백산대회는 물론 구국항일의병전쟁까지 참여한 점을 들어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논증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시작에 관한 1894년 당시 국내외 인식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거나 평가할 때, 사건이 일어난 그 당시의 인식이 어땠는가는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 중의 하나이다. 사건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나 체험자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제3자의 기록 등 그 당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인식과 평가가 가장 일차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사건을 전하거나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신뢰할만한 가치를 가진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그 당시 정부 관료는 물론 유림(儒林)을 비롯한 식자(識者)층의 기득권 세력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일반 백성, 그리고 일본 정부는 물론 군부(軍部)와 첩보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비롯한 각종 문서는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 조선 조정은 “고부의 민요(民擾)가 바로 이른바 동학당 소란의 시작이다.”[『고종실록』 31권, 1984년 2월 15일 古阜民擾卽所謂東學黨騷亂之始也.]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부사과(副司果) 이설(李偰)은 1894년 5월에 쓴 「남도의 소요를 논하고 느낀 점을 서술한 상소논남요진소회소(論南擾陳所懷疏)」에서 “이 난을 최초로 조성한 자는 [轉運使] 조필영(趙弼永)입니다. … 그리고 [均田使] 김창석(金昌錫) 또한 난을 조성한 자 중의 하나입니다. 난은 고부(古阜)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고부에서 난이 발생하도록 조장한 것은 전 군수(前 郡守) 조병갑(趙秉甲)입니다. … 그 난을 재촉한 자는 이용태(李容泰)가 아니겠습니까? 전 감사(前 監司) 김문현(金文鉉)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탐욕을 부려서 난을 조성한 뒤에 또 그들을 위무(慰撫)하지 않아 난을 야기하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자극하여 난을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난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여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자들로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 감사 김문현 지목하였다. 이들은 뒷날 5적(五賊)으로 불리었다.

 

공주의 유학자 이철영(李喆榮. 1867∼1919) 역시 동학도를 반적(叛賊)이라고 평하면서도 조필영과 조병갑을 ‘이조(二趙)’라 하면서, 이들의 학정으로 인하여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지금처럼 동학농민혁명을 1차와 2차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민란으로 인식한 것이다.

 

대한제국기 우국지사(憂國之士)로 알려진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지금 생각해 보면, 삼남지방에 민란이 일어나고 동학이 반란을 일으켜서 청국과 일본이 연이어 군대를 몰고 와서 천하가 동요되고, 종묘사직이 뒤흔들릴 만큼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은 모두 저 몹쓸 조병갑 한 놈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원인과 발단, 그 시작을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로 보았다. 더 나아가 청군과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함으로써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불러들인 근본원인으로 조병갑을 지목하였다. 좀 확대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1894년 당시 정서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당시 고부에 살았던 유생 류양천(柳陽川)의 일기체 기록인 『동학추고(東學推考)』 역시 “고부봉기를 주도한 세력이 기호지역의 세력과 연합하여 서울로 직행하려 했다.(合畿湖而直向京城)”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세울 당시부터 1회성의 우발적인 거사가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으로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학교도로 혁명에 직접 참여한 오지영(吳知泳) 역시 『동학사(東學史)』에서 1월의 고부봉기와 3월의 백산대회를 하나의 연속된 사건으로 기술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압살(壓殺)하며 조선 침략을 단계적으로 자행한 일본은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남긴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을 비롯한 여러 기록을 보면,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데에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 신문 역시 고부봉기에 대해서 대내외적인 목적을 갖춘 계획적인 봉기로 평가하고 있으며, ‘동학당(東學黨)’이 주도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동학의 구심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전라도 부안의 줄포(茁浦)에 살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목격하고, 1894년 1월 10일의 고부봉기부터 황토현전투 직후인 4월 12일까지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일기 형식의 보고서로 정리한 『전라도고부민요일기(全羅道古阜民擾日記)』가 있다. 일본인 파계생(巴溪生)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1894년 4월, 재부산일본총영사(在釜山日本總領事)를 통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되었는데, 일본 외무성은 이 보고서를 매우 중시해서 내각의 각 대신추밀원의장참모본부 차장 등에게 직접 읽어 볼 것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이후 일본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정책 수립에 기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고, 황토현전투 이후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고부봉기는 동학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며, 결론으로 “고부민란을 동학당 소요와 별도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여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밖에 1894년 당시 전봉준을 직접 만난 후 『동학당시찰일기(東學黨視察日記)』를 저술한 우미우라 아츠미海浦篤彌)는 당시 모든 봉기의 상황이 고부봉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오카다 소비(岡田庄兵衛)가 1894년에 편찬한 「賊徒의 主張과 그 起因」 (『朝鮮事件 : 內亂實記』)를 “원래 동학당은 종교적인 단체인데 이제는 완연히 정치적 혁명당이 되었고, 그 목적은 정부를 전복하고 정치를 혁신시키려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또 같은 책에 나오는 「小川書記生의 直話」에서는 고부봉기를 지방농민이 처음부터 고부군수는 물론 전라감사의 축출을 위한 전주성 함락까지 포함한 성격을 띠고 일으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는 인천 영사관의 서기였던 오가와가 영사관에 들어온 보고서와 정보를 보고 판단을 내린 것으로 현장성과 사실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본강점기 고부봉기에 관한 인식

 

1895년 4월 24일(양력) 새벽,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반란군 수괴(首魁)로 교수형을 당한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이었고 참여자들은 역적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그대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어졌는데,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이를 새롭게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평가한 글은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이 1926년에 발표한 『甲午東學亂과 全琫準』이다. 그러나 1937년 조선총독부에게서 출판금지를 당하였고, 1945년에 『한국말년서』 3권 중 하권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그 뒤 1931년에 김상기(金庠基)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東學과 東學亂」이 있고, 1936년 잡지 「조광(朝光)」 5월호에 「東學黨 首領 全琫準 生涯」 등이 발표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동학의 난’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 사회운동 내지는 혁명으로 평가하고자 하였으나 시대상황으로 한계가 있었고, 전봉준 개인에 집중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에 관한 글들이 발표되던 1936년에 정읍군지(井邑郡誌)』의 부록으로 전봉준실기(全琫準實記)」가 게재되었다. 정읍 출신으로 정읍에 거주하던 장봉선(張奉善)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지역의 역사를 정리하여 최초로 발표한 것이다.

 

장봉선은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러한 서술은 “全琫準이 古阜에 居住하여스며 東學亂의 發生地가 亦是 古阜임으로 此를 調査記入함”이라고 하였다. 즉 전봉준이 고부에서 살았고, 동학란의 발생지 역시 고부임으로 이에 조사하여 기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고부라는 전제하에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부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엇지하면 不共戴天의 怨讎를 갑흐며, 貪官汚吏를 除去하고, 썩어진 政客을 逐出하야 危機一髮인 國政을 扶立할가 期會[機會]만 엿보든 琫準은  

 

동학농민혁명은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이 조병갑의 모친상(母親喪)에 부의(賻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전봉준의 복수,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썩어빠진 정치인을 몰아내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일념으로 일어난 거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첫 번째로 지목한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겠다는 내용이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조병갑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구전(口傳)이 오랜 동안 전승되어 왔지만, 공신력 있는 사료를 통해 검증된 바는 없다. 또한 전봉준은 법정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봉준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서 고부봉기를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 혁명을 가장(假裝)하고 백성을 이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와 달리 고부봉기의 해산 동기는 다음과 같이 싱겁게 정리되었다.

 

“(전략) 適히 光州 出生으로 朴源明이라는 稱하는 분이  古阜郡守를 自願하였다. 三個月間이나 空虛하였든 官衙에 坐起하고 誠心으로 擾民에게 曉諭하여 解散키를 懇願하니 때는 群衆과 頭領 사이에 意見이 不致하여 軋轢이 有하던 터이라 朴 郡守의 懇曲한 曉諭에 解散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部下를 일흔 頭領들도 東離西走하여 버렸다.  

신임 고부 군수로 박원명이 부임하여 난민(亂民)에게 해산을 간곡히 청하니, 군중과 지도부 사이에 알력이 생겨서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하게 된 주된 동기를 박원명의 효유(曉諭)로 설명하고 있으며, 지도부가 흩어짐으로써 고부봉기는 일단락을 짓는 해산으로 정리하였다. 이와 함께 고부에서 해산한 전봉준의 이후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部下를 失한 봉준이 躬訪하야 救援을 請함에 화중은 時機尙早를 力說하여스나 全氏의 懇願에 應치 안을 수 엇섯다 하야 其徒 數千을 領率하고 各地에 橫行하야 曰 “方今 國政이 混亂하야 滅亡의 患이 朝夕에 잇으니 臣下된 者 엇지 袖手傍觀 하리오. 不肖 비록 菲才이나 各位의 幷力하야 革命을 煽動하야 不良한 政府를 □□고 政治를 一新改革하야 國家와 民衆을 救濟코자 하노라. 이갓치 宣傳하니 四方이 擊掌響應하엿다. 四月初에 大軍을 引率하고 更히 古阜地方에 入하야 馬項市場에 一泊하고 白山에 留陣하엿다.

 

고부에서 해산한 후 오갈 데 없는 전봉준이 무장의 손화중을 찾아가 구원을 청하였고, 시기상조를 내세우며 주저하던 손화중이 마침내 호응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서술은 훗날 고부봉기를 3월의 무장기포나 백산대회와 구분하고 분리시킴으로써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과 단절시키는 단초(端初)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에 인용한 바와 같이 “동학란의 발생지가 고부”라는 전제가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민란으로 본 고부봉기의 해산과 무장에서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등식은 이후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들에게 그대로 인용되었다. 즉 교조신원운동기를 거쳐 사발통문거사계획과 고부봉기, 무장기포와 백산대회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사발통문거사계획과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전단계(前段階)내지는 배경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3월 봉기[무장기포 또는 백산대회]로 정리하는 논거(論據)가 된 것이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를 구분한 방식은 만석보 수세로 상징되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 나아가 척왜양(斥倭洋)을 내세워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였다는 인식과 다를 뿐 아니라 해방 이후 학계에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발통문의 공개와 고부봉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일제강점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인식, 나아가 저작물이 있었지만 ‘동학란’이라는 흐름은 일반 대중에게는 그대로 이어졌다. 1954년에 ‘갑오민주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甲午民主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 전봉준이 살았던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세워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천안전씨 문중에서 문중 인물을 대상으로 기념물을 조성한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계기가 된 것은 1964년 10월, 황토현전적지에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었다. 5․16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며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가 참석, 자신의 아버지가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최고 실권자가 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해서 한 발언은 동학란을 동학혁명으로 바꾸는데 어쩌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박정희의 제막식 참석과 발언은 5․16군사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념탑 제막식과 박정희의 참석과 발언을 계기로 그간 반란과 역적의 굴레에 갇혀 지내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들이 서서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5년 뒤인 1968년 전국에서 최초로 「갑오동학혁명기념문화제」가 개최되었으며, 1969년에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특히 사발통문의 공개는 진위(眞僞) 여부와 함께 기존 학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보완할 점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부봉기의 성격이었다. 그것은 1974년에 발표된 김광래[「전봉준의 고부 백산 기병」 『나라사랑』 15호, 외솔회, 1974.]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종래 동학혁명을 논함에 있어서 흔히 갑오년 3월부터를 동학농민전쟁으로 취급하고, 그 이전을 일반 민란으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종래의 견해는 동학교도들의 ‘沙鉢通文’의 원문이 근래 발견되어 제고를 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근래 발견된 사발통문 원본을 보면,  고부봉기는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고부봉기를 일반 민란으로 보고, 3월 기포 이후를 본격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보아 온 견해는 수정되어야 하겠다.

 

이를 통해 그 당시 학계에서는 고부봉기를 민란으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3월 봉기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발통문이 공개됨으로써 고부봉기와 이후의 과정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조선 후기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되었음을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全琫準實記, 張奉善 著」 『井邑郡誌』에는 “박원명  성심으로 요민에게 효유하여 해산키로 간원하니, 때는 군중과 두령 사이에 의견이 불일치하여 알력이 있던 터이라. 박 군수의 간곡한 효유에 해산치 않을 수 없었다.” 라고 하여 농민군의 내분을 틈타 효유해산한 것같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설로는 동학농민군이 고부에서 봉기한 후 군수 박원명의 효유로 고부란은 이조 후기의 보통 민란의 성격을 띠고 일단 완전 해산된 것으로 생각해 왔다. 

박원명의 효유로 고부봉기가 해산하였고, 고부의 봉기는 조선 후기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논거가 장봉선의 「전봉준실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1969년에 사발통문이 공개됨으로써 고부봉기와 이후의 과정이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한편, 김광래는 사발통문의 공개로 고부봉기가 최초의 봉기였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일부의 농민군은 귀가했을지 모르나 주력 부대는 여전히 존속하였고, 전봉준 이하 간부들은 이들 농민군을 이끌고 또한 단독으로 각지로 밀행하면서 앞으로의 공작을 서둘러 갔다. 안핵사 이용태의 실책은 드디어 잔존하고 있던 이들 동학농민군이 주축이 되어 전봉준의 격문과 연락을 계기로, 이 해 3월 21일을 기하여 전반적인 갑오농민전쟁으로의 확대를 가져 오게 하였던 것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난을 불러일으킨 자(倡亂者)라면,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과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은 난을 키운 자였다.  1894년 1월의 고부봉기는 1893년 3월 보은집회 이후 호남 동학교도들이 1893년 말로부터 공작하여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일으킨 동학혁명으로의 최초의 봉기였다.

 

박원명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주력 부대는 남아 있었고, 전봉준은 이들과 함께 봉기의 확대를 모색하였다. 거기에 이용태의 만행이 자행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확대되었다. 고부봉기는 1893년 보은집회 이후 호남의 동학교도가 주도하여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김광래의 연구는 “민란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끝까지 해산하지 않고 존속하여 1894년 3월 21일을 기하여 전면적인 갑오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고 하여 고부민란과 제1차 농민전쟁을 직결시킴으로써 고부민란의 종래의 민란과의 차이성을 크게 부각시켰다.”[정창렬, 「고부민란 연구(상하)」, 『한국사연구』 49, 1985]는 평을 받았으나, 학계는 여전히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과 구분하였다.

 

사발통문, 고부봉기 우발적 사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아래 결행되었음을 확인

 

사발통문의 공개로 고부봉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형성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1차 동학농민혁명(3월 봉기)을 설명하거나 보완하는 자료로 인용되었다.

 

(전략) 사발통문은 갑오농민전쟁이 우발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전봉준최경선송대화 등이 중심이 되어 사전에 계획을 세워 고부봉기를 준비했으며, 또 실행에 옮겨져 1894년 3월의 갑오농민전쟁 1차 봉기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고부봉기 해산 이후 다시 무장을 찾은 전봉준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기병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3년] 12월 전봉준은 무장에서 서장옥손화중김개남 등과 봉기에 대한 사전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서장옥의 체포, 그리고 봉기 시기를 놓고 손화중과 의견 차이 등으로 인하여 결국 서장옥과 손화중이 빠진 상태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한 고부농민들과 함께 1894년 정월 고부봉기를 일으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것으로 생각된다.[조광환, 「전봉준의 생애연구 –고부봉기 이전의 행적을 중심으로 -」,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사발통문은 고부봉기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아래 결행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귀중한 자료이지만,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부봉기 해산 이후 전봉준이 손화중을 찾아가 간곡하게 거병을 요청함으로써 “1894년 3월의 갑오농민전쟁 1차 봉기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라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사발통문 공개 이후 김용덕은 백산대회에 대해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전략) (동학의) 혁명적인 교리로 보거나, 혁명을 의도하는 전봉준의 지향으로 보거나, 사발통문 모의에서 보거나, 고부봉기 이전에 있어서 접주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행동 강령이 정해져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실증하는 것이 백산맹약(白山盟約)이다.  이용태의 처사는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 접주들에게 재기의 기회와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4대명의는) 완전한 혁명공약이요, 혁명선언이라 할 것이다.  전해 11월부터 수차의 모의의 결론이며, (사발통문 결의를) 다시 진일보한 반봉건반침략의 혁명의 깃발이었다.  (4대명의)는 갑오년 동학운동의 계획성혁명성에 대한 논쟁은 거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거니와 

 

백산맹약, 즉 백산대회에서 나온 4대명의는 완전한 혁명 공약이요 혁명 선언으로 동학농민혁명의 계획성혁명성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이후 최현식과 조광환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사발통문이 공개되기 전까지 고부봉기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여타 민란과 다를 바 없는 민란으로 인식되었고, 3월에 이르러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주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발통문이 공개됨으로써 고부봉기가 여타 민란의 성격과 다르다는 점은 인정되었지만,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보지는 않았다.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의 단절

 

고부봉기가 여타 민란과 다른 성격을 갖지만,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3월 봉기부터라는 시각은 1980년에 발간된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한층 더 심화되었다.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거친 전문연구자는 아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 정읍에 거주하면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확인하며 정리한 『갑오동학혁명사』는 그 당시 대단한 관심을 받았고, 이후 고전(古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당대 역사학계의 중견이던 신석호(申奭鎬)가 쓴 서(序)와 최현식 본인이 쓴 자서(自序)를 보면, 공통적으로 고부봉기와 3월 봉기를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正月의 古阜郡守 趙秉甲의 不法을 糾彈하기 위하여 일어난 古阜의 農民蜂起로부터, 政治的 改革을 위하여 일어난 三月蜂起와 侵略者 日本軍을 擊退하기 위하여 일어난 九月蜂起 등 全國的으로 擴大된 愛國的 革命運動 全體를 상세히 記述한 것으로서 甲午東學革命運動의 眞意를 理解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最初로 發刊된 東學革命運動史라는 데에 또한 큰 意義가 있는 것이다.  

 

고부봉기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을 규탄하기 위하여 일어난 농민봉기이고, 3월 봉기는 정치적 개혁을 위하여 일어났으며, 9월 봉기는 침략자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애국적 혁명운동이라는 것이다. 즉 고부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지역봉기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애국운동으로 확산되었다는 흐름은 유지되고 있지만,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3월 봉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최현식 본인이 쓴 자서(自序)와 본문 목차에서 확인된다.

“甲午東學革命은 우리에게 近世의 黎明을 告하는 歷史의 새章이었다. 封建專制의 虐政에 對한 古阜農民의 抗拒와 東學의 三月蜂起는 바로 民權의 鬪爭이었으며, 侵略 日本에 抵抗하는 九月蜂起는 民族의 自衛를 爲한 民衆의 抗戰이었으니, … ”

 

당초 최현식이 정리한 동학농민혁명 4단계는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두고, 대오를 갖추며 본격적으로 출발한 것은 백산대회라는 취지로 이해된다. 그러나 고부봉기는 해산하여 일단락된 사건, 즉 무장기포와 연속되는 사건이 아니라 별개의 사건으로 정리하고, 백산대회를 기포지나 발상지로 정리하였다. 특히 신석호는 서문에서 “고부봉기는 조병갑의 학정에 맞선 봉기인 반면에, 3월 봉기는 정치적 개혁을 위해서 일어난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고부봉기와 3월 봉기를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최현식의 글을 읽고 내린 결론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하게도 고부봉기는 단순한 민란으로 분리되고 본격적인 혁명의 시작은 3월 봉기가 되었다. 신석호의 서(序)와 최현식 본인이 쓴 자서(自序)를 구체화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고부농민봉기는 민란이란 이유로 경외(境外古阜郡외 지역)로 나가지도 못한 채 두어 달 동안 군아를 점령하고 있다가 3월(古阜民擾日記)에 들어 군수 박원명(朴源明)과의 타협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전봉준이 그 공초에서 말했듯이 2차 거사는 이용태의 만행으로 말미암아 다시 유발되었던 것이다.  조신들간에는 고부의 난은 조필영(趙弼永)조병갑(趙秉甲)으로 말미암아 발단이 되었고, 이용태는 이를 확대시킨 과오를 저질렀다고 규탄하기도 하였다.  안핵사 이용태의 난폭한 처사에 격분을 금치 못한 전봉준은 갑오동학혁명의 영도 인물이었던 태인(泰仁)의 동학접주 김개남(金開南)최경선(崔景(卿)善)무장(茂長) 접주 손화중(孫華仲)과 거사할 것을 결심했다.

 

고부봉기는 ‘민란’이라는 한계로 인해 확산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군중은 신임 고부 군수 박원명과 타협한 뒤에 해산하였다. 그리고 고부에서의 난은 조필영과 조병갑 때문에 일어났지만,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은 이용태의 만행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봉준은 물론 조정에서도 같은 인식이었다. 즉 이용태의 만행에 격분한 전봉준이 김개남과 최경선, 그리고 손화중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결심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부봉기는 지역적인 민란이었던 까닭에 박원명의 효유로 해산하고 일단락되었는데, 이용태의 만행이 자행되면서 2차 거사가 이루어져 3월에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부봉기가 해산하였다는 최현식의 이러한 인식은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參考 : 정월, 고부봉기 후 해산하지 않은 채 백산성에 웅거하여 계속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 기록(「東徒問辨」․「全琫準供招」․「全琫準實記」)을 참고한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첫째, 이용태 안핵사軍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 만행을 다 했다면, 백산성의 농민군들을 그대로 용인했을지? 또 상호충돌로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萬石洑를 毁破한 후 얼마든지 계속하다가 일단 해산한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둘째, 전봉준이 그 供招에서 ‘更爲起包’ 즉 다시 일어났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더욱 그렇다. 「古阜民擾日記」에는 3월 13일 해산했다고 하였다.

 

최현식은 여러 기록을 예로 들어 고봉봉기가 지속되지 못하고 해산한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먼저 동학농민군이 백산에 웅거하였다면 이용태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백산에 웅거하고 있는 군중을 진압하려는 전투도 없었으며, 고부봉기 이후 ‘다시 일어났다’는 전봉준의 진술과 이용태의 만행으로 다시 시작된 것으로 정리하였다. 즉 안핵사 이용태의 난폭한 처사에 격분을 금치 못한 전봉준은 갑오동학혁명의 영도 인물들이었던 태인의 동학접주 김개남최경선, 무장접주 손화중과 거사할 것을 결심했다. 전봉준은 그 공초에서 3월 봉기의 목적이 제폭구민에 있는데, 그것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조정의 나쁜 무리들까지 제거하여 조선 팔도에 미친다고 하였다.”라고 정리함으로써 고부봉기와 3월 봉기를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이처럼 고부봉기를 해산으로 정리하여 동학농민혁명과 분리하고,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발상지)을 3월 봉기로 구분한 이후 1985년 신용하[「갑오농민정쟁의 1차 농민전쟁」(『한국학보』, 1985, 여름호)]역사학회 월례발표회(1992. 3. 14)와 정창렬[「고부민란 연구(상하)」, 『한국사연구』 49, 1985.], 1992년 노용필,[역사학회 월례발표회(1992. 3. 14)] 등의 논문이 발표되어 무장기포설이 공론화(公論化)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인지한 최현식은 “갑오동학혁명의 발상지가 고부가 아닌 무장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며, 「무장기포설고(茂長起包說考)」를 통해 무장기포설을 부정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고부봉기가 아닌 3월 봉기, 즉 백산대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현식의 「무장기포설고」는 별다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고부봉기에 대한 성격규명보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백산대회라는 점만 부각되었다.

 

한편, 이러한 최현식의 인식과 주장은 1998년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와 정읍시가 주최한 제31회 「동학농민혁명기념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개최된 『동학농민군 명예회복 및 국가유공자 서훈 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한 「서훈대상(敍勳對象) 인물(人物)의 검토」에서 구체화되었다. 서훈의 공평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의 3원칙을 적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시기는 1894년 3월에서 1899년 정읍농민봉기(世稱 영학당 사건) 기간으로 할 것.

2. 서훈은 전사자 또는 관헌에 의하여 희생을 당한 사람으로 할 것.

3. 서훈자는 당시의 기록과 자손들의 증언과 고증자료, 즉, 족보기록(1945년 이전)을 근거로 할 것.

 

서훈 대상자 선정은 동학농민혁명 참여 전사자(戰死者) 등 희생당한 분들을 원칙으로 하되, 1894년 3월을 기점으로 하여 이른바 ‘영학당(英學黨)사건’까지 설정하였다. 여기에서 3월은 무장기포가 아니라 백산대회이다. 이로써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전 단계나 배경이 될 수밖에 없었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백산대회가 되었다.

최현식의 이러한 주장은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기존의 인식과 달랐지만, 이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더욱이 ‘1894년 3월’이라는 시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무장기포가 될 수도 있고, 백산대회가 될 수도 있었다. 최현식 본인은 3월을 백산대회로 설정했지만, 결과적으로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최현식의 논리는 2004년 3월 5일에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로 정의함으로써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제외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을 준비하던 2000년대 초반 그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범위를 고부봉기가 일어난 1월이 아닌 3월로 정할 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 정읍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3월 봉기부터라는 데에 동의하였거나 암묵적으로 묵인(默認)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표는 최현식이 발간한 『갑오동학혁명사』와 『전라문화논총』에 게재된 「古阜와 甲午東學革命」 목차이다.

 

『갑오동학혁명사』(1980)

「古阜와 甲午東學革命」(1994)

제1장 서설(序說)

제2장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

제1절 고부농민(古阜農民)의 진정(陳情)

제2절 고부군아(古阜郡衙)의 점령(占領)

제3절 안핵사 이용태(按覈使 李容泰)

제3장 삼월봉기(三月蜂起)

제1절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華仲)

제2절 백산봉기(白山蜂起)

제8절 정부(政府)의 외군청병(外軍請兵)

제4장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의 민정(民政)

제1절 전주화약(全州和約)과 폐정개혁(弊政改革)

제2절 집강소 설치와 나주성(羅州城)

제3절 남원에서의 김개남(金開南)

제5장 구월봉기(九月蜂起)

제1절 일본군(日本軍)의 궁성침입(宮城侵入)

제7절 공주(公州)의 혈전(血戰)

제6장 최후(最後)의 항전(抗戰) 

Ⅰ. 머리말

Ⅱ. 古阜農民蜂起

1. 沙鉢通文

2. 古阜郡衙의 占領

Ⅲ. 三月蜂起

1. 白山蜂起

2. 東學農民軍의 大捷

3. 全州入城

4. 執綱所 民政

Ⅳ. 九月蜂起

1. 日本軍의 宮城侵入

2. 參禮蜂起

3. 各處의 蜂起

4. 公州 싸움

Ⅴ. 最後의 抗戰

Ⅵ. 己亥井邑農民蜂起

1. 古阜英學契

2. 崔益西의 蜂起

큰 틀에서는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고부봉기 해산 후 3월에 이르러 백산에서 본격적으로 혁명이 시작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2006년에 발간된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갑오동학혁명은 크게 나누어 제1단계 고부농민봉기, 제2단계 백산기포(3월봉기), 제3단계(혹은 집강소 민정) 9월봉기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다 집강소 민정을 한 단계로 설정해서 4단계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제1단계 고부농민봉기는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고부 군민의 거사였으니, 성격상 민란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목적이 민란의 성격을 벗어나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는 점이다.  고부농민봉기를 갑오동학혁명의 기점으로, 또는 그 봉기지를 발상지로는 보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 3월봉기의 백산기포는 동학교의 조직이 동원된 거도적인 봉기로 또한 목적하는 바가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표방함으로써 고부농민봉기와는 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하의 무장기포설을 검토한 뒤 결론에서) 무장집회가 백산집회의 전 단계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장집회는 백산집회(전체가 모이기로 한)로 가기 위해서 무장지방(인근을 포함)의 모임이란 뜻이다. ③ 백산에서 각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비로소 동학농민군으로서의 대오를 결성했으니 이곳을 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발상지란 단순한 집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오를 결성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백산집회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기점 또는 발상지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산에서 각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모여 비로소 동학농민군으로서 대오를 갖추었으므로 백산을 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최현식의 이러한 논리는 조광환에게 이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2014년에 출간된 조광환의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은 2008년에 발간된 『소통하는 역사』의 개정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008년부터 2014년까지 6년은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제정과 관련하여 연구자들 사이에 또는 지역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제1장 19세기 후반 조선 민중의 동향 1. 세도 정치로 인한 통치 질서의 문란 2. 신분제도의 동요와 민중의식의 성장 3. 서양 세력의 침투와 동학의 출현 열강의 침탈과 강화도 조약/동학의 창도

제2장 동학의 교세 확장과 교조 신원 운동 1. 공주 집회 2. 삼례 집회 3. 광화문 복합 상소와 괘서 사건 4. 보은 집회와 금구 집회 제3장 사발통문과 고부 농민 봉기 1. 조병갑을 위한 변명 2. 고부 농민 봉기의 도화선 만석보 3. 떴다! 사발통문 4. 고부 농민 봉기와 말목 장터 제4장 1차 동학농민혁명(3월 봉기) 1.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2. 황토현 대첩 3. 장성 황룡강 전투

특히 2011년에는 국민 여론조사를 통한 기념일 제정을 추진하려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이에 반발하는 지역과 단체 사이에 극한 대립이 있었다. 갈등의 주된 원인은 무장기포와 황토현전승일로 압축된 기념일 후보에 고부봉기가 포함된 것이었다. 즉 그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기념일 후보에서 제외되었던 고부봉기가 포함됨으로써 이에 불만을 가진 지역과 관계자들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기념일 제정 추진방법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초판과 개정판 2권의 단행본에 실린 목차는 동일한 것으로 배경과 초기 전개과정의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제1장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현상과 민중의 동향을 서술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대 상황에 대한 개괄이었다.

 

제2장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으로, 동학의 교세 확장을 바탕으로 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비롯한 동학의 공인과 도인에 대한 침탈과 수탈을 금지시켜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는 혁신세력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3장과 제4장을 따로 두어 구분하고 분리시킴으로써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과 다른 별도의 사건으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제1차 동학농민혁명은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으로 상징되는 백산대회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흥미로운 점은 무장기포가 소제목에서조차 생략된 것이다. 즉 사발통문거사계획, 고부봉기,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황룡전투 등 일련의 과정에서 무장기포만 생략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현식은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백산대회에 두었고, 조광환 역시 같은 시각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최현식과 조광환 모두 3월 봉기를 백산대회로 설정하였고, 무장기포는 고부에서 시작된 봉기가 백산으로 이어지는 경유지 또는 중간과정으로 정리하였다. 고부봉기에 대한 이러한 정리는, 결과적으로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하여 분리시켰고, 더 나아가 단절시키는 데에 일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올바른 동학농민혁명사 정립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당시는 물론 그 이후 다수 국민에게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즉 고부에서 시작된 봉기가 혁명의 출발이며 시작이었고, ‘고부 동학당의 난’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 고부봉기가 2004년에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정의된 동학농민혁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더욱이 현행 검인정한국사교과서 다수는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갑작스런 결과가 아니었다.

 

1936년 정읍 출신 장봉선이 『정읍군지』에 실은 「전봉준실기」에서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한 이래, 학계는 물론 정읍 출신의 최현식과 조광환 역시 이 논리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1998년에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최현식은 “동학농민혁명 서훈 대상자는 1894년 3월 봉기[백산대회]부터”라는 주장을 하였고,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후보로 고부봉기가 아닌 백산대회를 추천하였다. 그 결과 고부봉기는 2004년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서 정의된 동학농민혁명에서 제외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에 제동을 걸고, 보다 더 객관적인 정황을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검증할 기회가 있었다. 즉 “무장기포는 앞에 말한 신용하 교수의 연구[「갑오농민정쟁의 1차 농민전쟁」(『한국학보』, 1985, 여름호)] 이후, 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고부농민봉기를 농민혁명의 시작으로 이해하던 종전의 시각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무장기포에 의해 본격적인 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김인걸, 「1894년 농민전쟁의 1차 봉기」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 농민혁명 발발 단계에서 두 사건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역사적 의의는 두 사건의 계획과 진행과정이 유기적으로 설명될 때 명확하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이진영, 「茂長起包의 성립과 全羅道 高敞地域의 동학농민혁명」 『한국근현대사연구』 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라는 제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귀기우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눈앞에 닥친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제정을 앞에 두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2004년에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과 같은 해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거치면서 고부봉기가 후보에서 제외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중 어느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냐에 대한 정리는 쉽지 않다. 더욱이 학계의 범주를 넘어선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개정과 검인정한국사교과서 수정은 난해한 문제이다. 특히 고부봉기가 벌어졌던 지역, 즉 정읍에서 그간 정리하거나 발표한 연구 성과가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과 따로 구분해 왔다는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므로 동학농민혁명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읍지역이 풀어야 숙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대길 문학박사. <사람과 언론> 제7호(2019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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