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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인물탐구

신경준 선생의 식견은 넓고도 깊었다

427 판문점 선언으로 더욱 빛나는 역사의 가르침

신경준 선생의 식견은 넓고도 깊었다

 

 -이강록(편집고문)

 


판문점 선언의 시기에 가져야 할 태도

 

바야흐로 시대가 변하고 있다. 지난 427일 판문점 선언으로 남과 북이 이어지려는 기운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중이다. 이런 변혁의 움직임은 화려한 수사나 말잔치에 그쳐서는 안 되고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실속이 없는 말잔치는 한낱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그 알맹이를 얻으려면 역사와 철학을 깨우쳐야 한다. 그런데 역사만 공부해서는 사건이나 인물만 기억할 뿐 깊이가 없고, 철학만 공부해서는 공허해지고 뜬구름을 잡게 될 뿐이다. 그래서 역사와 철학은 서로 엮어가며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곧 경경위사(經經緯史). 다시 말해 경학(經學)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아 입체적으로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는 얘기다.

 

경학(오늘날의 철학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또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예컨대 사람은 거짓 없이 참되게 살아야 한다든가, 예의와 염치를 알아야 한다든가 등등이다. 철학 없이 무턱대고 산다는 것은 그저 무의미한 삶일 따름이다. 곧 경경위사의 가르침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고금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경학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역사의 가르침, 즉 사실(史實)을 알아야 만이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남과 북이 이어지려는 오늘의 과제를 풀어가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알고 싶어도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궁금한 것은 스스로 찾아보면 알게 된다고 했지만 이것도 안이한 방관이었다. 여러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그랬고 안내자 또는 길잡이라 할 마땅한 선생이나 교사도 없었다.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그릇되고 삿된 거짓 사실을 진실이라 받아들였다. 대표적으로 일제(日帝)의 우리 땅에 대한 지리교육이 그랬다. 이미 수백년 전 우리 선조들이 펴낸 책과 그림에도 진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몽매했던 우리가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 무턱대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거짓 정보, 조작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 땅을 생각해왔다. 잘못된 학습,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현실대응을 해왔는데 올바른 소득을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최근 들어서야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고 있기는 하다.

 

아인슈타인은 '미친 짓(Insanity)'에 대해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젠 지금까지 방식이 잘못됐으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라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결과에는 다 까닭이 있다. 이것을 알면 세상의 섭리에 능통해진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책이 있고 도판이 있다. 여기에 얼마든지 가르침과 지혜가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턱대고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배척했다. 이제 돌아보면 선인들의 빼어난 식견과 통찰력에 감동한다. 바로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이치가 여기에 있다. 이런 가르침과 지혜를 어찌 도서관의 책더미 속에 파묻어두고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지. 그 지혜와 가르침의 하나가 바로 신경준(申景濬)<산경표(山經表)>

 

<산경표>를 펼치면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는 네 글자가 책머리에 우뚝 서 있다. 글자 네 개로 늠름하게 우리 국토를 대표한다. <산경표>를 처음 대했을 때의 감동은 몇 마디 말로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렵다. 때문에 '한 지리학자의 사고력이 조국강토를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구나' 하는 현기증마저 일게 된다.

 

나이 지긋한 독자들은 소싯적 학교에서 잘 외워지지도 않는 산맥 이름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또 우리나라지도에 굵고 검은 선으로 갈비뼈처럼 그려져 있던 국토의 산줄기는 얼마나 생경했던가.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외우려 했던 산맥의 이름들은 일본 지질학자가 붙여준 것이며 일제의 음흉한 책략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하물며 우리 선조들이 수백년전 이미 책으로 펴냈고 명명해 부르던 전통적인 산줄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서는 무지가 얼마나 죄악인지도 깨우쳤다. 전통의 배척과 고전의 외면은 이렇듯 무지몽매를 널리 퍼뜨렸다.

 

무엇보다 전통적 지리학이건 근대지리학이건 그 기본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고 또 후손에 물려줘야 할 우리 국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이다. 국토의 체계적인 이해 또는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돼야 할 인물이 바로 여암(旅庵) 신경준(1712~1781)이다.

 

잊혀진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

 

신경준은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 고 말했다. 이 한 마디로 산과 물의 속성을 압축했다.

 

백두대간·장백정간·청남정맥·한북정맥을 들어보았는가. 금남정맥·호남정맥을 들어보았는가. 물론 익숙한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터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그리고 낙남정맥 등의 이름이 바로 신경준의 산경표에서 온 이름이다. <산경표> 책은 백두대간 장백정간으로 시작해 호남정맥으로 끝을 맺는다.

 

여암은 조선시대 영·정조 시기의 실학자로 국어와 지리는 물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실학자이자 행정관료였다. 여암은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각종 저술을 남겼다. <동국여지도>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는 물론 특히 <강계지(疆界志)> <도로고(道路考)> <산경표> 등을 통해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그는 1769년 산경표를 저술하면서 우리나라 산맥을 연속된 산줄기를 기준으로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했다.

 

<고지도>의 제작자인 신경준은 신말주(申末舟)의 후손으로 천문, 지리, 음운학에 밝았다. 특히 그는 조선팔도의 산천 지리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명으로 정상기의 동국여지도>와 팔도분도 등을 감수했다. 그의 저서로는 강계지, 산수경, 도로고, 산경표 등의 지리서와 여암집(旅庵集)이 있다

 

여암은 동국문헌비고 중의 여지고’ ‘강계지’ ‘사연고’ ‘도로고’ ‘산수경(山水經)’등의 지리서를 편찬했고 동국여지도, 팔도지도 등의 지도도 편찬했다. 그리고 여지편람을 편찬했으며, 여지편람의 일부가 산경표이다. 산경표는 정확히 얘기하면 지도가 아니라 지리서이다. 산줄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아니고 마치 사람의 족보처럼 정리했다. 대간과 정맥은 종으로, 정맥에서 갈라진 기맥은 횡으로 정리해 일목요연하다.

 

이처럼 쉽고 과학적이며 오래된 산줄기와 지리체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의 산맥도에 의도적으로 가려져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만약 1980년 이우형이라는 지도제작자가 고책방에서 산경표를 우연히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산경표와 백두대간 등 우리고유의 산줄기 인식은 아예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중요한 지리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순창에서 태어난 실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여암은 일생동안 여행을 많이 다녔다. 북청부사·순천부사·제주목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니 조선팔도가 속속들이 머릿속에 있었을 터이다. 그는 지도와 관련된 저술들을 남겼는데, 그중에 명저가 산경표다. 한반도의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으로 돼 있으며, 이 백두대간이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으로 구성됐다고 밝혀놓은 책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산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표로 정리한 것이 산경표이며, 지도화한 것이 산경도이다.

 

<강계고>는 우리나라 역대의 강계와 지명 등을 고찰한 역사지리서로서 일본, 대만, 유구국(오키나와), 섬라국(태국) 등도 별도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연고>는 압록강 두만강 등 강로와 각 도별 연해로(沿海路), 중국 일본과의 해로, 조석 등 주로 수로 교통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도로고>는 어로와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는 육대로(六大路), 그리고 사연로(四沿路)와 팔도해연로(八道海沿路), 대중소(大中小)의 역로(驛路), 봉로(熢路), 해로(海路), 외국과의 해로(海路), 조석(潮汐), 전국 장시의 개시일 등 각종 도로와 정기 시장이 망라된 글이다.

 

<가람고>는 각 군현별 사찰의 위치, 연혁 등을, <군현지제>는 우리나라 군현제의 실상과 문제점 등을 지적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 '동국팔로도소식(東國八路圖小識)' '어제여지도소서(御製輿地圖小序)' 등의 글을 보면 여암이 지도 제작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일가견을 가지고 당시의 지도 편찬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17세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었음을 그의 저작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여암은 당대에는 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인정했던 뛰어난 지리학자였다.

 

上曰 申景濬地圖 承旨曾前見之乎 浩修曰 未見而聞之 則別樣爲之云矣 本來以地理學有 名稱 而承此下敎 渠竭力爲之矣” (承政院日記1,308, 영조 4683)

 

조선시대 홍문관 대제학 홍양호(洪良浩)는 신경준의 학문에 대하여 백 가지 학문을 모으되 자신이 도로 절충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여암 신공은 큰 재주와 넓은 식견을 지녔으면서도 넓고 깊이 찾는 노력을 더하여 …… 심오한 도리를 끄집어 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백 가지의 학문을 모으되 자신의 도에 절충을 하였다. 말로 드러낼 때에는 넓어서 다함이 없고 선명하여 꼭 들어맞으며, 글로 나타낼 때는 이전 사람들의 말을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드러냈다. 규칙에 구차히 속박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원칙에 벗어나지 않아 탁연히 일가로서의 학문을 이루었으니, 유가 드문 굉재이며 희세의 통유이다.”(耳溪先生集 11, 旅菴集序; 耳溪洪良浩全書)

 

또한 그가 여러 학문에 박학하면서 특히 우리 나라의 산천과 도리에 더욱 밝았음을 강조했다.

 

於本國山川道里 尤瞭然 如在目中”(耳溪先生集33, 左承旨旅庵申公景濬 墓碣銘幷序; 耳溪洪良浩全書)

 

하지만 여암은 불행하게도 20세기 지리학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리학보다도 국어학자로 일찍부터 평가를 받았으나 (정인보, 1937, “훈민정음운해 해제,” 한글54(통권 44) 강신항, 1959, “신경준의 기본적 국어학 연구태도,” 국어국문학통권 201965, “신경준의 학문과 생애,” 성대문학111969) 그의 주요 저작은 지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 중에 시문과 성리학적인 글들과 훈민정음운해외에 대작(大作)

 

산수고(山水考), 강계고(疆界考)』 『사연고(四沿考)』 『도로고(道路考)』 『군현지제(郡縣之制)』 『가람고(伽藍考)』 「차제책(車制策)등 대개 지리학적인 것으로서, 여암만큼 다방면에 걸친 지리학 저술을 남긴 사람은 없다.

 

지리학에까지 뻗친 일제의 음흉한 책략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산맥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기초를 두고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失洋昌永)가 재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자원 찬탈을 시도하기에 앞서 고토로 하여금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우리나라 지질을 탐사토록 한 결과 산맥이 등장했다. 산맥은 백두산을 매개로 일체가 되는 우리의 민족의 구심점을 없애고 백두대간을 훼절시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도입됐다.

 

백두대간을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나눴고, 그렇게 나눈 산맥에 잔가지를 붙여 백두대간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하게 했다. 또한 낭림산맥을 강조 태배산맥-낭림산맥의 선을 나라지형의 중심축으로 부각시켰다. 태백, 소백 등 다른 산맥은 모두 산이름이 들어갔으나 백두산이 있는 마천령 산맥은 고개이름인 마천령을 따서 마천령산맥이라고 지명했다. 또한 가장 짧은 산맥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백두산 최고봉을 일왕의 이름인 대정으로 정하여 대정봉(大正峰)이라고 바꿔 놓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고토가 우리나라 땅을 조사한 기간은 1900년 및 1902년 두 차례에 걸친 14개월 동안이었다. 어떻게 기술수준도 미약했던 100여년 전에 한 나라의 지질구조를 단지 14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완전하게 조사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럼에도 1903년에 발표된 고토의 지질학적 연구성과는 우리나라 지리학의 기초로 자리잡아 지리교과서에 버젓이 들어앉았다. 고토는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했다.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했다. 그러다보니 땅위의 산줄기들의 흐름은 무시되고 땅속의 모양새만 따지다보니 산맥줄기가 강이나 내를 건너뛰고,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현실임에도 우리는 여태껏 우리 손으로 이 땅을 조사해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일제의 침략야욕이 만들어낸 지리개념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어서 딱하기만 하다. 일제 식민지 치하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우리 지형에 맞지도 않는 산맥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잃어버린 산줄기의 체계와 산줄기 이름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 '정도로 보면 될 듯)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설립됐다.

 

<택리지> <도리표>에 이어서 1913년에 지리서로서 세 번째로 간행된 책이 <산경표>였다. 이 영인본의 책머리에 실려 있는 서문 겸 해제에는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그윽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란하고 계통이 없다. 오직 신경준이 편찬한 <여지고>산경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아 읍치(邑治)를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산경표는 산경을 바탕으로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산경표>는 바탕으로 삼은 산경의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지리가(地理家)의 나침반이 될 만하다."

 

이처럼 <산경표>를 우리나라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낸 책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지리학에 관한 연구들은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여전히 조선시대의 다른 학자나 실학자에 비하여 여암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 본 그의 저술만으로도 신경준은 조선 후기 지리학, 나아가 실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음에 반하여 그는 왕명을 받아 국가적인 편찬 사업에 그의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던 점 또한 주목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일제에 의해 잃어버린 산줄기 체계와 산줄기의 이름을 뒤늦게나마 되찾아가는 과정이 그나마 위안 받는 현실이다.

 

산경표의 실사구시 정신 되살려야

 

18세기는 조선 후기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였다. 17세기부터 싹을 피웠던 실학적 지리학도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사회변화와 함께 국토 지역의 구조가 변화함을 인식하고, 지리학의 중요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여 지리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러나 여암 신경준처럼 방대한 지리학 저작을 남기고,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인정받아 국가적인 편찬사업으로 연결시켰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는 우리나라의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의 분합(分合)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산수를 중심으로 국토의 자연을 정리했으나, 그 속에는 인간 생활과 통합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산경표><산수고>를 바탕으로 했으나 또 다른 지역 인식 체계를 보여주며, 우리가 불렀던 산줄기의 이름과 체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남과 북이 하나로 뭉쳐가려는 이즈음 옛 선인들의 실사구시 정신과 국토에 대한 애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오늘의 현실에 접목하려는 자세는 매우 요긴하다.

 

옛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려는 태도 또한 지양해야 하며 전통과 고전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융합시켜야 하는가도 고려해봐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창조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도 유념할 대목이 다. 국토를 체계적으로 이해했던 옛 선인의 과학적 사고는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산경표>는 우리 국토의 자연 체계와 그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고전이다. 때문에 조선시대 학자가 남긴 저술 가운데 21세기에도 여전히 실용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창씨개명된 채 버려진 우리 산줄기 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제 남북이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를 이어가겠다는 마당에 산경표와 여암 신경준 선생의 정신이 되살려졌으면 한다

/<사람과 언론> 창간호(2018년 여름)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