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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권력을 누리면 사람이 달라질까? : 권력에 대한 단상

mediapark 2019. 6. 28. 16:51

<강준만 교수의 명언 에세이>

 

왜 권력을 누리면 사람이 달라질까? : 권력에 대한 단상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저 사람 안 그랬었는데 권력 맛을 보더니 달라졌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궁금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긴 하지만, 사실 그 이유를 모르진 않는다. 권력이 있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당장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조아려가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아무리 겸손했던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겸손하게 대하기는 어렵다. 좀 건방지고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갖는 것이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게 달라진 태도를 한동안 지속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태도가 몸에 배게 되고, 이는 오랜만에 만난 예전의 친지들을 대할 때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실 그런 정도의 변화야 얼마든지 애교로도 봐줄 수 있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권력이 독선과 오만에 미치는 영향이다. 아일랜드 신경심리학자 이언 로버트슨(Ian Robertson)은 개코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권력감은 코카인과 같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권력감은 도파민이라는 신경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해 뇌의 중독 중추를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집단의 하위에 있는 개코원숭이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도파민 분비량이 늘었다. 그럴수록 공격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쪽으로 변모했다. 로버트슨은 "권력이 강할수록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고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성격이 된다"며 "절대 권력의 속성을 생물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치판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종필(1926-2018)은 “괜찮던 사람도 저어기(청와대)만 들어가면 바뀐다”는 명언을 남겼다. 왜 저어기만 들어가면 바뀌는 걸까? 굳이 도파민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 이유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청와대 거주 기간 내내 하루 온종일 아부의 폭포수를 맞기 때문이다. 대통령 행차시 그 어마어마한 경호요원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대통령을 인간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국가를 책임진 신(神)과 다를 바 없다.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모든 이들이 대통령 앞에만 가면 허리와 머리가 크게 유연해진다. 다른 신을 모시는 이교도들은 대통령을 비판하고 욕을 하기도 하지만, 대통령 주변에서 그런 법은 없다. 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만 불려진다. 그런 환경에서 바뀌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게다. 그러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 집단적으로 만든 제도 탓이다.

 

권력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된 법칙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은 “우리는 대통령에게 도저히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과,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도저히 한 사람이 견뎌낼 수 없는 압박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어찌 생각하면 대통령제란 인간이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제도임에 틀림없지만, 모두가 진지하고 심각할 뿐 웃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게 진짜 문제다.

 

어떤 식으로건 권력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된 법칙이었나 보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피타쿠스(Pittacus, 650-570 B.C.)는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인간 됨됨이가 드러난다”고 했으니 말이다. 눈꼽만한 권력이라도 갖게 된 사람이 그 권력으로 인해 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문제라기보다는 권력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걸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영국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액튼 경(Lord Acton, 1834~1902)은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권력은 인간을 타락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권력을 갖게 되면 권력을 타락시킨다”고 했고, 존 스타인벡은 “권력은 부패하지 않는다. 두려움, 아마도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부패한다”고 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 어리석은 자가 다수이고 현명한 자가 극소수라면, 그리고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어찌 보아야 할까? 권력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권력이 무섭다는 건 권력 행사의 결과를 두고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힘, 그게 더 무서운 것이다.

 

‘권력 부패론’에 대한 반론이 나오는 건 권력이 필요악(必要惡)이기 때문일 게다.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무어(Robert L. Moore, 1942-2016)가 그걸 잘 설명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그 욕망이 생명을 창조하고 세계를 건설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도록 지켜보는 일이다.” 즉, 선하게 쓰이는 권력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결코 권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비록 그렇게 쓰일 확률이 낮을지라도, 그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권력을 선하게 쓸 것으로 믿고 지지했던 권력자들마저 ‘권력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노예’가 되는 모습에 절망하곤 한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말마따나, “권력은 치사한 것이다.” 실제로 권력을 접하거나 상대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권력이 치사하고 더럽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을 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정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

 

권력이 없고 권력을 가질 뜻도 없는 사람들은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경험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건 피하기 어려운, 권력의 마술인 것 같다. 2013년 9월 전 호주 총리 줄리아 길라드(Julia E. Gillard)가 3개월전 실권(失權) 당시 받은 충격을 영국 가디언지의 호주판에 실린 특별 기고문에서 처음으로 털어놓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권력을 잃은 극심한 고통은 육체적·정서적으로 전해진다. 나 스스로 건재하다고 느끼다가도 타인이 위로를 건넬 때건, 찬장 구석에서 기념품을 발견했을 때건, 농담할 때건, 주먹으로 가격당하는 듯한 갑작스러운 아픔이 튀어나온다"고 말했다.

 

권력을 잃은 극심한 고통은 우선 당장 ‘사회권’의 축소에서부터 시작된다. 중국의 전 총서기 조자양의 일급 브레인이었으나 천안문 사태시 반혁명분자로 몰려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 경제학자 엄가기는 󰡔수뇌론󰡕이라는 책에서 “퇴임후 수뇌의 이른바 ‘사회권’은 원래보다 수백, 수천, 수만 분의 1 정도로 갑자기 축소된다”고 말한다. 찾아오는 사람도 확연히 감소되며 중요한 정보의 근원도 단절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엄가기는 독일의 아데나워, 프랑스의 드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영국의 처칠, 미국의 닉슨 등을 예로 들며 퇴임한 수뇌의 고독과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국의 수뇌만 그런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 누구건 조직에 몸 담았다가 은퇴를 하면 황량하고 살벌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갑자기 쪼그라든 ‘사회권’에 적응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 지식인 유아사 다케오는 “권력은 설탕이다”고 했는데, 이 관점에 따르자면 권력의 상실은 ‘저혈당 쇼크’ 상태와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체 게바라가 왜 스스로 권력을 떠나 게릴라 투쟁에 뛰어들었는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권력은 설탕만큼이나 달콤한 것이다. 설탕에 수없이 많은 개미가 몰려들 듯 권력의 주변에는 인간이 몰려든다. 권력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인간은 흔하지 않다. 역사를 통해 권력을 추구한 인간의 종말이 어떠했는가를 수없이 학습한 인간이라 해도, 당장 눈앞에 권력이 맴돌게 되면 이성을 잃는 게 현실이다. 게바라는 그것이 꺼림칙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체 게바라는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지만, 그런 사람은 매우 희소하다. 임지현은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이라는 글에서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 ‘현실 참여’와 ‘권력에의 꿈’ 사이의 간격은 생각만큼 그리 넓지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왜 마오쩌둥이 중국 황제의 내궁인 중난하이에 자신의 거처를 잡았는지, 레닌은 왜 차르의 유서 깊은 궁전인 크렘린에 입주했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대의가 승리한 것인지 ‘권력에의 꿈’이 실현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길이 없다. 중난하이와 크렘린의 상징적 의미는 후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더해준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바꿔보겠다는 열정도 권력욕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에게 권력은 열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런 착각을 지속시킨다. 윤리와 염치가 실종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정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쉽다. 모든 혁명과 개혁의 타락은 바로 그런 착각에서 연유한다.

 

영국 사상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갈파했듯이, “권력을 쉬지 않고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런 권력욕구는 오직 죽어서만 멈춘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도 “개인이 대의(大義)나 공동체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때조차도 권력에의 의지는 여전히 갖고 있다”고 했다. 둘 다 누구나 다 명심해야 할 금언이지만, “나는 예외다”는 생각이 권력의 그런 속성을 외면하게 만든다. 특히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착각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어떠하건 권력욕 또는 권력의지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는 걸 깨닫는 성찰 능력이 필요한 것 같다.

 

“겸손이 밥 먹여 주느냐?” 반론 앞서 ‘겸손 실천해본 적은 있는지’ 자문자답부터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은 “워싱턴의 최고 마약은 권력이다. 권력은 감각을 둔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했다. 권력이 설탕이건 마약이건 권력의 속성이 어디 워싱턴에서만 나타나는 일이겠는가? 서울과 전주에서도, 크고 작은 조직에서도 다를 게 없다. 공적 권력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집무실에 “권력은 설탕이다”라거나 “권력은 마약이다”라는 표어를 써붙이고 매일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미국의 미디어 비평가 켄 아울레타(Ken Auletta)는 한 지역언론 학술대회에서 “3만 피트 상공을 나는 제트기 창문에서 바라볼 때, 땅위의 사람들은 개미처럼 보인다”고 했다. 사람을 개미처럼 생각하면서 그들을 객체화하는 건 비단 중앙의 권력, 언론, 대기업만 저지르는 일이 아니다. 중앙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는 지역의 작은 권력자들도 그런 유혹을 받기 십상이다. 특히 지역언론은 기존의 ‘권력자 모델’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취재원들과 싸우기 위해 언론 스스로 권력자가 되는 건 불가피한 점이 있지만, 문제는 그게 습관이나 체질로 고착돼 낮은 곳에 임해야 할 때에도 권력자 자세를 취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특히 지역언론의 목을 치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지역신문 기자 출신인 미국 저널리스트 제프 카니는 자신이 크게 성공한 것은 지역신문에서 ‘품위 있게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형일간지에선 기자들이 사람들의 삶 속에 뛰어 들어갔다가 바로 다시 나오지만, 지역신문 기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지역주민들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게 지역언론 기자들이 지녀야 할 첫 번째 자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겸손이 밥 먹여 주느냐?”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하지만, 그 이전에 겸손을 실천해본 적은 있는지 자문자답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겸손은 권력의 속성에 대한 해독제로서, 권력 사탕의 유혹을 거부하는 것 이상으로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겸손해지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며, 그걸 발견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구조 탓’과 ‘경제 탓’을 넘어서는 지역언론의 살 길도 열릴 수 있다.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겸손은 권력에의 의지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고,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Jules Renard, 1864-1910)는 “잘 나가는 사람이 겸손하긴 쉽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겸손하긴 어렵다”고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겸손에 대한 속물적 이해에 따르자면 그렇다. 그런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겸손을 실천하자는 것이지만, 스스로 “지역언론은 별 볼일 없는 언론이기에 겸손하기 어려운 건가?”라고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어차피 ‘권력자 모델’을 흉내만 낼 뿐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 모델’과 같은 정반대의 모델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지금은 우이독경(牛耳讀經)처럼 들릴망정 <사람과 언론>과 같은 작은 시도가 밑거름이 되어 종국엔 지역언론의 풍경을 바꾸는 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 글은 계간지 <사람과 언론> 제5호(2019년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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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크 로터러(Jock Lauterer), 장호순 옮김, [지역공동체 신문](커뮤니케이션북스, 2006/2008), 280쪽.
  • 윌 듀란트(Will Durant), 이철민 옮김, [철학 이야기](청년사, 1926/1987), 236쪽.